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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았다. 진회색 승합차에서 내린 청년들이 그를 끌어내렸다. 외국어로 떠들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국 청년들은 그를 젖은 자루처럼 폐유리 더미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파편이 튀어 올랐고 뾰족한 유리 조각이 그의 겨울용 점퍼를 뚫고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유리공장 소년, 서원이었다. 벌판이 지금 벌판이기 전, 숲이었던 시절부터 유리를 칼처럼 휘두르며 뛰어다녔다.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 나는 슬리퍼를 신은 아이는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니다 제 맘이 내키는 곳에 다리를 벌리고 오줌을 눴다. 에비스철강, 테라테크, 투스타스틸, S1엠블럼, 재이화학, 서원산업. 철탑의 편평한 쇠 모서리에 매달려 끝을 뾰족하게 깎은 크레용을 움켜쥐고 공장 이름을 썼다. 더 자라서는 철탑을 향해 배구공을 던졌고 바람 빠진 공을 차며 벌판을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타던 시절에는 휘파람을 불며 철탑 사이를 날렵하게 지나쳤다. 건들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뱉다가 불을 끄지 않은 꽁초를 벌판에 휙 내던졌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폐유리 더미에 던져져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는 아이였던 그를, 소년과 청년 시절의 그를, 현재의 그를 좋아했다. 잘나서도 아니고 인성이 좋거나 부자여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라는 걸 희미하게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였고 그의 모든 것을 여러 겹으로 봐왔다.
우리는 그의 발목에 매달렸고 셔츠에 붙었고, 침대 헤드레스트에 매달려 순한 표정으로 잠든 얼굴을 보았다.
서원이 기침하며 왈칵 피를 토해냈다. 바람이 철탑을 세차게 후려쳤고 고압 전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승합차 뒤에 주차한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가 서원 앞에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사내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목을 뒤로 꺾었다.
“잘 들어. 애초에 하청은 없었고, 어?”
그는 의식을 잃은 듯 반응이 없었다. 사내가 그의 뺨을 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는 서원의 눈에서 붉은 물이 흘렀다. 이국 청년이 그의 몸을 뒤적거려 점퍼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사내에게 줬다. 사내는 서류를 확인한 후 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이국 청년이 서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유리를 뽑았다.
“메탄올인지 에탄올인지 난 그런 거 모르고.”
“……메탄, 큭.”
서원이 대답하려는데 사내가 머리채를 뒤로 홱 더 꺾었다. 피가 흐르는 코가 닿을 정도로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일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라, 그 여자, 깨우 얼른 치워.”
사내가 이국 청년의 손에서 낚아챈 유리를 흙바닥에 비볐다. 유리 끝으로 그의 허벅지를 꾹꾹, 누르다 찌를 기세로 그의 목울대에 댔다.
멈춰, 하지 마, 멈춰.
우리는 일제히 소리 질렀다. 우리는 경사진 표면에 흐르던 물방울이 닿아 합쳐지듯 서로 스며들고 파고들어 덩어리가 되었다. 미약한 힘을 한데 모아 한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고압 전선을 통과한 전파가 파득 빛을 일으키며 벌판의 어떤 전파에 가 닿았다. 우리는 얇은 막처럼 펼쳐져 흙을 뒤덮고 자극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흙이 바람을 일으켜 사내를 향해, 사내의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유리를 잡은 손으로 흙을 피해 얼굴과 눈을 가렸다. 흙바람이 벌판을 휘저었다. 환영처럼 진눈깨비가 내렸다. 가래침을 뱉은 사내가 유리를 치켜들었을 때, 이국 청년이 그의 팔을 잡았다. 청년이 벌판의 한 지점을 손짓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녹색 컨테이너 문이 벌컥 열렸다.
“핸드폰, 안, 터졌어요. 재이, 잠깐만요.”
녹색 컨테이너 문을 열어놓은 채 나온 여자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하늘을 쳐다보다 허공에 손을 뻗었다. 깨우, 깨우야. 우리는 그녀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눈이 오나 봐요. 저는 눈이 보이질 않아요. 네, 진실로요.”
철탑 사이로 눈이 흩날렸다. 벌판과 컨테이너에 흰 눈이 옥양목을 덮은 듯 편평하게 쌓였다. 사내는 들고 있던 유리를 서원의 허벅지에 던져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죽 장갑으로 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승용차에 탔다. 이국 청년들도 승합차에 올라탔다. 두 대의 차가 요란하게 지나가자 깨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몸에 유리 파편이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서원이 옆으로 꼬꾸라졌다. 그 위로 눈이 쌓였다.
뭔가 조치해야 해. 저 여자, 깨우가 도와줄 거야. 맞아, 전파를 교란해 밖으로 끌어냈잖아. 그럼 뭐해, 깨우는 앞이 안 보여.
우리는 철탑의 쇠 난간을 타고 미끄러졌다. 더미에서 분리되며 각자 말했다.
깨우는 컨테이너 벽에 기대섰다. 컨테이너는 눈이 닿은 표면에만 흰 눈이 달라붙었다. 깨우가 기대선 곳은 여전히 녹색이었다.
피가 나. 기절한 것 같아, 어떻게 해봐. 재이, 재이한테 알릴 방법을 찾아, 조용히 좀 해.
그때, 벌판 끝 공단 고가도로에서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육중한 트럭들이 눈발을 뚫고 도로를 짓누르며 달려갔다. 신호를 받은 몇 대의 트럭이 빠르게 지나가자 벌판은 더 고요해졌다. 눈의 입자와 입자 사이, 그 하얀 틈으로 소리가 흡수됐다. 휘이이이, 울리던 철탑의 활선 주위로 적막이 흘렀다. 새들이 흩어지는 눈 사이로 날아가 하얗게 사라졌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깨우는 귀에 핸드폰을 대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목을 휘감고 있던 청록색 머플러가 길게 풀려 휘날렸다. 서원의 점퍼 주머니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트럼펫 연주 소리. 트럼펫 소리는 땅에 닿지 못한 눈과 함께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올랐다. 그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손을 뻗으며 걸었다. 조용하게 이어지던 트럼펫 소리가 뚝 멈췄다.
깨우가 핸드폰 단축키를 눌렀다. 흩날리는 눈 사이로 장엄한 트럼펫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깨우는 양팔을 벌려 눈 사이를 더듬어 소리 나는 곳으로 향해갔다.
29호 철탑 가까이 폐유리가 적재된 곳까지 다가온 깨우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서원 사장님? 거기, 있어요?”
깨우가 더딘 걸음으로 트렘펫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우리는 올이 성긴 여름용 머플러를 잡아당겼다. 길게 늘어진 청록색 머플러 위로 흰 눈이 떨어졌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