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강렬하지만, 직감적으로 떠올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여섯 살의 기억이 떠올라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책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가끔 숨을 크게 들이켜는 순간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죄를 짓는 기분이 되어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되돌이키지 않았다.
여섯 살 사내아이 두 명은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색종이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보냈고 자주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행기에서 내려온 계단을 오를 때는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구름이 깔린 창밖의 풍경을 보기 위해 자리 싸움을 했다. 가슴 속에 뭉친 구름이 착착 쌓여 헛웃음이 났다. 오랜 비행으로 싸우는 것에도 흥미를 잃은 우리는 투명 플라스틱 안에 들어있는 빵과 샐러드, 달콤한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었다. 우리 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우리의 입을 닦아주고 얌전하게 굴라고 주의 줬다. 계단을 다시 내려가 어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여자는 우리 둘한테 똑같은 옷을 입혀주었다. 흰 셔츠 위에 녹색 조끼를 입은 우리는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똑같이 생겨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분명 우린 두 명이었다.
또 다른 기억에는 나 혼자 비행기에 앉아 기내식을 먹고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창밖의 구름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기분이 상쾌해지지 않았다. 몽글몽글 뭉쳐있는 구름 덩어리들이 죄다 축축 처져 보였다. 버려졌다는 생각과 뭔가 죄지은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불안해했다. 죄를 지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서류 봉투에서 사진 두 장을 훔쳤다. 흰 셔츠에 녹색 조끼를 입었던 우리가 #5186, 4, 11, 71과 #5187, 4, 11, 71이라 적힌 종이판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을 이 책방에 오던 날 내 손에 닿은 책을 꺼내 갈피 사이에 끼워놓았다. 그 후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그 책이 팔렸는지 확인했다.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책을 꺼내 펼쳐본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 나와 함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간 아이는 내 쌍둥이 동생이라고 했다. 우리 둘을 입양하기로 한 사람들은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에서 중책을 맡은 간부였다. 그들은 다른 입양 지원자보다 더 큰 비용을 복지원에 냈고 복지원 후원에도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쌍둥이 둘을 모두 입양을 결정했고 서류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에게 오랫동안 실패했던 시험관 아기가 동생의 양어머니 자궁에 안정적으로 착상했다. 그들은 곧바로 둘 중 한 명만을 입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복지원에 전달이 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파양을 결정했고 위로금과 편도 비행기표를 줬다.
열세 살, 내가 머무는 책방에 방문한 그녀들은 아버지에게 내 쌍둥이 동생을 입양한 가정에서 나를 초청했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여름 방학 때 비행기표를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침묵으로 기억을 지우려 했던 나와는 달리 내 쌍둥이 동생은 끊임없이 양부모에게 내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다고 했다. 게다가 시험관 아기가 태어난 지 칠 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내 쌍둥이 동생의 양부모는 내 파양 결정의 죄책감으로 몇 년을 보내다 나를 재 입양할 결정을 했다고 했다. 내 양어머니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확인한 동생의 양부모님은 적극적으로 입양기관에 자신들의 의견을 어필했다. 입양기관에서는 원칙적으로 친부모와 남은 가족에게 양부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거액의 후원금 지원을 유지하고 싶었을 거였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입양기관을 통해 밝혔다. 특히 내 쌍둥이 동생의 양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보상 조건의 수위를 높였다. 입양 절차에 따른 비용만 넉넉하게 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그들의 결정에 아버지는 심하게 반발했다. 아버지에게 어떤 경제적 지원을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입양기관에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꽤 노력했던 것 같았다. 그즈음 입양기관의 그들은 책방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녀들은 책방에 올 때마다 미국에서 보내왔다는 선물 꾸러미를 전해줬다. 향이 강한 초콜릿, 알록달록한 옷, 유명 브랜드 운동화. 그리고 그 애의 사진을 가져다주었다. 내 쌍둥이 동생은 나와 얼굴은 닮았지만 키는 한 뼘 정도 훌쩍 컸고 햇볕에 타서인지 얼굴은 나보다 더 검었다. 인조 잔디가 깔린 구장에서 야구 배트를 들고 폼을 잡고 서 있었는데 어깨는 벌어졌고 가슴이 딴딴해 보였다. 다른 사진은 그들이 사는 집의 거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벽난로와 피아노 사이에 놓인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많은 선물이 리본을 매달고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엉덩이를 들어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갑 안이 빈 것을 발견하고 갑을 구겼다.
“알고 있었지?”
아버지의 질문이 쌍둥이 동생의 존재라든가 아니면 두 명이 함께 입양을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에 갔다가 나는 거절당해 되돌아온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 다녀올래? 동생도 만나고.”
나는 고개를 돌려 곁에 앉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눈썹 끝이 처져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이 무섭다고 대답했다. 속으론 나와는 너무나 다르게 자란 쌍둥이 동생을 만나는 것이 더 두려웠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곧바로 무서우면 타지 말아야지, 라고 말했다. 가끔 책더미 속에서 고등학생용 사회과 부도를 꺼내 세계지도를 펼쳐 미국 북부 미시간주와 디트로이트를 찾아보았다. 지도상으로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실제 거리는 10648km였다. 상상을 할 수 없는 거리만큼 나와는 다른 세계임이 분명했다. 슬픔이 슬픔을 알아보듯 그리움도 경험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었다. 그리움의 감정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나는 다른 세계에서 멋진 청년으로 자라고 있는 쌍둥이 동생의 사진을 받을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매번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내 동생의 양어머니가 써 보냈다. 나는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답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다음주에 최종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