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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비의 음률' 최종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2-15 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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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으로 쏟아지던 소나기는 긴 장맛비로 이어졌다. 나는 여자가 다락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책방 문을 잠그고 알루미늄 셔터를 내렸다. 셔터의 자물쇠는 채우지 않았다. 다음 날 셔터를 올릴 때마다 여자가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셔터를 올렸다. 모퉁이를 돌면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장이 파헤쳐진 슬픈 짐승처럼 몸을 웅크려 두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흰 고양이 열쇠고리가 달린 빨간 백 팩 안의 물건을 본 적이 있었다. 일부러 엿본 것은 아니고 여자가 뭔가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다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안엣 것을 쏟아 부었다. 화장품, 속옷, 세면도구 등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가방에서 쏟아진 것은 문제집, 연습장, 영어 단어를 빽빽하게 적어 놓은 수첩, 매일 공부한 분량과 시간을 적어 놓은 스터디 플래너, 티머니가 든 카드 지갑, 안경 통, 샤프와 여러 가지 색의 펜과 형광펜, 스톱워치, 화이트, 귀마개, 이어폰, 계산기까지 들어있어 속이 꽉 찬 필통, 틴트라고 불리는 립스틱과 마스카라, 손거울이 든 파우치 등. 대충 봐도 여고생의 가방이었다. 여자는 필통을 꺼내 빨간 볼펜을 꺼냈다. 볼펜을 들고 여자 앞에 펼쳐놓은 수학 문제집의 한 부분을 펼쳐 정답지를 보며 채점했다. 나는 여자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자가 매긴 문제는 서른다섯 문제였고 모든 문제는 정답으로 다 맞았다. 딸의 문제집을 찾았냐는 내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문제집을 덮고 책의 표면을 손으로 쓸었다. 

“공부를 잘하나 보군요.”

여자는 대답 없이 허락 없이 문제집을 빨간 백 팩에 넣었다. 쏟아 부었던 물건들도 차곡차곡 가방에 담았다. 여자의 딸이 지금은 이 세계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나는 할 수 없었다. 위로는 슬픔을 달래준다고 생각하는 자의 이기적인 행위였다. 어떤 말과 어떤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 어떤 상태는 도저히 위로할 수 없었다. 나는 어설픈 위로로 여자의 슬픔을 건드릴 수 없었다.

“공부밖에 모르는 애였어요. 그날, 비도 내리고 늦었는데도 거울에 매달려 틴트를 발랐어요. 학교는 아파트 후문으로 가면 걸어서 10분 거리였어요. 늦었다고 차로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거울 앞에서 멋 부리는 모습이 얄미워 뛰어가라고 했어요. 아파트 후문에서 나가자마자 도로를 횡단했을 거예요.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휘어진 내리막길에다 관목 수풀이 우거져 급정거했다지만 5톤 트럭이.”

여자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닌 어떤 소설의 한 장면을 말해주듯 빠르게 말했다. 그러다 말을 멈췄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일부러 여자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라면 상자에서 명품 테마 위인전 전집을 꺼냈다. 어린이책을 꽂아 둔 책꽂이에서 오래되고 찢겨진 책을 빼 라면상자에 담고 새로 구입한 위인전을 꽂았다. 여자는 책을 꽂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섰다. 

“너무나 보고 싶은데, 벽제에 있는데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잊어버렸어요. 저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여자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그곳을 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비가 그치면 저와 함께 그곳에 가봅시다. 제가 데려다줄게요.”

여자는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속했지만, 여자는 내가 책방 뒤 창고에 라면 상자를 놓고 왔을 때 사라졌다. 퍼붓는 장맛비 사이로 우산도 없이 여자는 거리로 나섰을 거였다. 급한 마음에 나는 살이 꺾여 한쪽이 짜부라진 우산을 쓰고 골목을 뛰어 내려갔다. 지하 공예 상가와 벽화 골목, 철길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촘촘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빨간 백 팩을 멘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온몸이 땀과 비에 젖어 물속의 생선 같았다. 나는 미끄러지듯 책방으로 들어섰다. 카운터 책상 의자에 앉아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쓴 편지를 집어 들었다. 보고 싶다며 집으로 놀러 오라는 아이의 편지를 욀 정도로 반복해서 다시 읽었다. 끊임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라는 말이 나는 거북했다. 제이슨이 가진 여유로운 감정과 솔직함이 부담스러웠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 버림받은 내 처지를 그가 안쓰러워하고 있다고 여겼다. 나는 빈곤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는데 그가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해 내 현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불쾌했다. 십오 년 전 그가 금발의 여자와 함께 이 책방을 방문했을 때도 나는 반갑거나 설레지 않았다. 그는 송도 국제도시에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우리들의 생모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난 과거를 캐내는 것과 익숙 하지 않는 감정을 요구하는 그가 싫었다. 건성으로 대하는 내 태도에 그는 화내지 않지 않았고 만날 때마다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나는 어색해 곧바로 손을 뺐다. 그의 휴가 기간이 끝날 때까지 나의 바람대로 우리의 생모는 찾아낼 수 없었다. 

제이슨은 떠나기 전날 다시 책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문을 닫으려다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곤 말없이 책 기둥에 기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담배는 몸에 해롭다며 건강을 염려하는 말을 했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바로 눈앞에 꽂혀있는 책등에 시선을 두었다. 나는 책의 제목을 읽은 후 작가의 약력을 떠올렸다. 그가 나에게 담배 하나를 달라고 말하며 내 곁으로 당겨 앉았을 때는 좀 편안한 기분이 되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의 양부모가 제안한 재입양을 거절하기 잘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표정으로 곁에 앉은 그를 쳐다보았다. 

“늘 보고 싶다고 말한 건 너였어.”

제이슨은 양어머니가 자신을 만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욕을 시켜주다가 약간 이상하게 더듬는 것을 알아차렸다. 양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마다 노골적으로 침대로 끌고 가 옷을 벗겼다고 말했다. 나는 종이컵을 그의 양어머니 얼굴이라 여기며 담뱃불을 종이컵에 비볐다. 화가 풀리지 않아 종이컵을 구겼다. 내가 입 밖으로 소리 낸 욕을 알아들었는지 그가 끅끅 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형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형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어.”

사진 속에 있는 반백의 제이슨은 신기하게도 현재 거울 속의 나와 똑 같았다. 청년 시절에 보낸 사진에서는 나와 닮은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얼굴이라 여겼다. 나는 제일 안쪽에 있는 책꽂이 앞에 간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갔다. 책장의 제일 꼭대기에 꽂혀 있는 『바보배』책을 꺼냈다. 책의 갈피를 넘기다 오랜 시간 동안 책갈피 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태어나자마자 나에게 들러붙은 것이 슬픔이었다. 나는 슬픔을 알아보고 슬픔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감정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겼다.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낯 설은 어떤 감정이 사진을 펼쳐볼 때마다 일렁거렸다. 두 개의 사진 중 내 것이 아닌 사진을 꺼내 내 얼굴에 비볐다. 빗소리가 들렸다.


-다음주부터는 '환상 소녀'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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