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윤 소설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앓았다. 진아 언니도 홍역을 앓았다고 했다. 언니들은 얼굴에 바람이 들어가면 곰보가 된다며 나에게 올 때마다 밍크 담요를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선아 언니는 만화책, 유리가면을 빌려다 주었다. 나는 만화책도 읽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되게 앓았다. 숱하게 많은 꿈을 꾸었고 잠이 깨었을 때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다. 이불에 그려진 해바라기가 모두 사람으로 변해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엎드린 채 꼼짝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바로 눕히자 해바라기가 모두 새로 변해 날아갔다. 또, 누군가 내 다리를 잘랐다. 검게 흐르던 피가 새빨갛게 보이고 피가 다 마르자 기타를 치며 다가온 청년이 나에게 노랗게 색칠된 플라스틱 다리를 끼웠다. 나는 플라스틱 다리를 끼운 채 고무줄을 타 넘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할머니 요강에 앉아 오줌을 누며 경대에 비치는 얼굴을 보았다. 내 얼굴은 씹다만 팥을 뱉어 놓은 것처럼 우툴두툴했고 술 취한 할머니 얼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할머니는 땀에 절은 내복을 벗기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었다. 나는 할머니의 쪼그라진 젖꼭지를 빨며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할머니는 나를 밀쳐내지 않고 젖을 물려주곤 토닥여 주었다. 내가 젖꼭지를 세게 빨아 당기면 할머니는 흐흐,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곤 밍크 담요를 머리끝까지 씌어주었다. 할머니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잠결에 엄마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이 깊었나 봐요, 어머니 젖을 빨았다지 뭡니까.”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절에 가 머무는 동안 젖이 말라 자매 중 나만 엄마 젖을 못 먹였다고 늘 안쓰러워했다. 아버지가 내 이마를 짚으면 아픈 와중에도 나는 일부러 숨을 더 크게 헉헉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얼굴에 붉은 꽃이 거의 사라졌지만 나는 방학 숙제가 하기 싫어 이불 속에 더 누워 유리가면을 읽었다. 선아 언니가 일부러 서툰 글씨로 방학 숙제를 해주었다. 나는 남은 방학 내내 엄살을 부리며 질릴 정도로 만화책을 봤다. 할머니는 만화를 보는 내게 자라며 불을 끄고는 젖을 물렸다. 나는 흐물흐물한 할머니의 젖이 싫었지만 젖을 물고 있다가 할머니가 코를 골면 일어나 공부방으로 가 만화책을 읽었다. 개학날에도 할머니는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가방에서 방학 숙제를 꺼내다 검은 종이에 싸여 있는 초콜릿을 보았다. 검은 레이스 종이는 구겨졌고 꽃 모양의 초콜릿은 뭉개져 있었다. 초콜릿을 종이에 잘 싸서 빨간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파란 대문에는 밖으로 굵은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절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마루에서 세 명의 보살이 촛대를 닦고 있었다. 마루 끝에 앉아 마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청년은 보이질 않았다. 청년의 알머리를 야금야금 베어 먹던 감과 잎들을 죄 떨어져 마당 안이 허전했다. 마당 가운에 있던 평상은 없고 마당 여기저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보살들이 소곤거렸다. 보상 받았데? 보상은 철도무단 횡단은 원래 벌금 내야하는데 사정이 딱하니깐 봐준 거래. 목발 짚고 그 새벽에 왜 올라갔어? 다리에 물감 칠을 마구 해댔더라고. 원래 좀 정신이. 쉬잇, 쟤 듣겠어.
그들은 할 말을 다하고선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일어나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올라서서 발끝을 들었다. 감나무 아래 기타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기타 위에는 눈이 쌓여 있지만 분명 청년의 기타였다. 감나무 아래 쌓여 있는 눈 위로 검은 고무줄이 보였다.
“얘, 신발 신고 마루에 올라서면 어떡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보살이 들고 있는 촛대에 쏟아지던 겨울 햇살이 내 눈을 찔렀다. 눈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다. 손가락으로 눈을 누르며 절 마당을 나섰다. 굴다리로 가 벽에 기대섰다.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종이를 벗겨냈다. 초콜릿은 입 안에 넣자마자 녹았다. 쓴 맛이 났다. 쩔걱쩔걱 기차 소리가 귓속을 쿵쿵 치며 다가왔다. 체크무늬 담요 속에 누워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도 여자 옆에 서서 머리 바로 위로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윤희와 미아는 숫자를 다 셌으면 얼른 다시 태어나라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태어나기 싫으니깐 너희들끼리 살아 보라고 말하고 더욱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장롱 제일 밑에서 꺼낸 원앙금침 이불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났다.
“언니는 아예 죽어 버린 거야?”
윤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청년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멀리서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기차를 향해 두 개의 깃발 중 빨간색 깃발을 들어 올리며 다가설 것이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 이마에 닿았던 청년의 입술을 떠올렸다. 관사 가까이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 가운데로 검은 물감 같은 것이 쿨럭쿨럭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끝]
안녕하세요? 소설가 박정윤입니다. 언제나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5회에 걸쳐 게재한 단편소설 「기차가 지나간다」에 이어서 다음주부터는
단편소설 「목공 소녀」가 토요일마다 게재될 예정입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