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윤 소설가
우리는 각자의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 무덤은 장미로 뒤덮였다. 뱀이 무덤을 지나쳤고 늑대가 어슬렁거렸다. 바람이 불고 눈이 쌓였다. 계절을 건너 뛰어 봄이 오면 눈이 녹았고 죽음의 기간이 끝났다. 우리는 태어나 재빨리 자랐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양품점을 하는 나는 장롱을 열어 엄마의 옷을 꺼냈다. 빨간 재봉틀 앞에 앉아 옷을 재단하는 척 흉내 낸 뒤 동생들에게 입혔다. 윤희는 은행 직원이었고, 미아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일 년이 끝날 즈음에 모두 죽어버렸다. 나는 재봉틀의 뾰족한 바늘에 찔려 죽었고, 미아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윤희는 자꾸자꾸 죽는 것이 싫다고 했다. 나는 죽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며 얼른 죽으라고 윤희를 꼬드겼다. 윤희는 아프지 않고 편안히 자다가 죽었다. 우리는 밍크 이불로 만든 각자의 무덤 속으로 파고들었다. 108까지 숫자를 세고 나면 우린 다시 태어났다. 일 년이 지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으로 역할을 바꿨다. 나는 여전히 양품점을 했다. 오 년이 지나도 엄마는 오질 않았다.
우리는 다시 무덤을 만들었다. 나는 장미가 그려진 빨간 밍크 담요 속으로 들어갔다. 미아는 호랑이가 그려진 주황색 담요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윤희는 목단이 화려한 무덤 안에서 밖을 빠끔 내다보았다. 우리들 누구도 죽어서 슬프지 않았다. 무덤은 알록달록하고 포근했다. 동생들은 각자 무덤 안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나는 동생들에게 죽었으므로 웃지 말고 움직이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불 속에서 웅크려 까불거리던 동생들이 잠잠해지다가 이불을 걷어차며 잠이 들었다. 나는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재봉틀 서랍에 천 조각을 넣고, 옷장에서 꺼낸 옷을 있던 모양 그대로 넣었다.
평상에 앉아 언니의 미술책을 펼쳤다. 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오려 종이인형의 스웨터와 치마를 만들었다. 인형 어깨에 걸 수 있게 걸이를 그린 뒤 가위로 오려냈다. 커다란 가위는 녹이 슬어 손에서 녹내가 났다. 치마를 오려내고 있을 때, 마당 밖에서 방울소리가 들렸다.
"또, 종이쪼가리를 오려내? 어지르는 데 선수구나. 엄마를 돕지는 못할망정. 일어나 냉수 가져와."
엄마는 아카브 구씨가 끄는 리어카를 뒤에서 밀며 고개만 내밀곤 소리 질렀다. 나는 인형을 미술책 사이에 끼워 넣고 수돗가로 갔다. 바가지에 수돗물을 받아 가지고 왔다. 엄마는 평상에 앉아 냉수를 들이켰다. 아카브 구씨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발에 물을 끼얹었다.
"스덴냄비들을 기스 가지 않게 조심해서 방 안으로 날라 놔라."
나는 비닐을 씌운 냄비를 하나씩 들어 방 안에 들여놓았다. 어쩌다 비닐 부분이 벗겨진 곳에 손톱이 닿으면 끼익, 소름 돋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소주 한 병과 김치를 쟁반에 담아 평상으로 가져왔다. 아카브 구씨는 엄마가 컵에 따라준 술을 단숨에 마시곤 냄비들을 두세 개씩 들어 방안에 들여 주었다. 그가 리어카를 돌려 마당을 나갈 때, 나는 그를 따라 나갔다.
"니가 일곱째나?"
그는 나를 보면 늘 그렇게 물었다. 그의 검은 얼굴과 목에 술이 올라 벌게졌다. 그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주었다. 나는 뒤돌아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돈을 받았다. 아카브 구씨는 빈 리어카를 끌고 갔다. 리어카 손잡이 옆에 달린 방울이 뎅강뎅강 경쾌한 소리를 냈다.
엄마는 평상에 앉아 스테인리스 냄비와 법랑 냄비의 개수를 헤아리고 수첩에 계산한 돈을 적었다. 나는 상 위에 펼쳐 놓은 책들을 챙겼다. 언니의 미술책에서 인형 옷이 떨어졌다. 순간, 엄마는 수첩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나는 재빨리 인형 옷을 책 사이에 넣었다. 엄마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수요일에 엄마가 강릉 갈 테니깐, 요 집에 가서 아줌마를 오라고 해라."
엄마는 수첩에서 뒷장을 뜯어 약도를 그렸다.
"시장 초입에 있는 굴다리를 지나면 포교당이라는 절이 바로 보일 거다. 바로 그 옆집이야. 아무도 없으면 기다렸다가 꼭 데리고 와라."
그 여자다.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 언니들과 할머니는 자주 싸웠다. 엄마는 꿈에서 용을 봤다는 이유로 내가 아들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평생 그런 꿈을 못 꾸었다고 했다. 미타사 큰스님이 이름도 지어 주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고추가 아닌 것만 확인하곤 나를 엎어 놓았다고 했다. 언니들이 나를 바로 눕혔다. 사흘 동안 냉수만 마시던 엄마는 미타사에 갔다. 언니들이 엄마 젖 대신 쌀뜨물과 분유 섞은 것을 나에게 먹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늦기 전에 밖에서 아들을 봐오라고 했다. 불안했던 엄마는 다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큰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내가 네 살 때 미아를, 다음 해에 윤희를 낳았다.
시장 초입에 있는 굴다리를 반 정도 지나칠 때, 바닥에 있던 밤색 체크무늬 담요가 꿈틀거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담요 속에서 얼굴을 내민 여자가 굴다리 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누웠다. 머리맡에 펼쳐진 보따리에는 지저분한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여자가 움직이지 않을 때, 발걸음을 빨리 해 굴다리를 지났다. 절 바로 옆에 파란 대문 집이 보였다. 감나무 가지가 절 마당에까지 뻗쳤고 대문 안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 평상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자 천천히 대문이 열렸다. 얼굴이 창백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머리는 깎아 놓은 배처럼 박박 밀어져 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때, 굴다리 위로 기차가 지나갔다. 청년이 목을 꺾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봤다. 나도 청년을 따라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청년은 왼손으로 양쪽 목발을 잡고 오른손을 기차를 향해 흔들었다. 기차가 지나가자 청년은 겨드랑이에 목발을 고정시키고 나를 노려보았다. 얼핏 보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자주색 체육복을 입은 청년은 자세히 보니 대학생인 진아 언니보다 어려 보였다. 내가 아줌마를 찾아왔다고 말하자 청년은 신경질적으로 없다고 말하고 대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닫힌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포교당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돌계단을 올라갔다. 마루 끝에 앉아 옆집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감나무 잎과 가지 사이로 기타를 치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말랑말랑한 감이 청년의 하얀 알머리에 주황색 구멍을 냈다. 바람이 불면 감 대신 이파리가 청년의 알머리를 야금야금 삼켰다. 그는 책장을 넘기다 돌멩이로 책을 고정해 놓고 두 소절 부르다 또다시 책장을 넘겼다. 나는 절 마당을 지나 다시 파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너 누구야? 왜 남을 훔쳐봐?"
청년은 대문을 열곤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가방 어깨 끈을 손으로 꼭 붙잡고 청년의 알머리를 쏘아보았다.
"나에 대해서는 알 것 없고, 아줌마 언제 와?"
"어쭈 쪼그만 게 반말이네? 모른다고."
"다음에 올게."
나는 그가 대문을 닫기 전에 몸을 홱, 돌렸다. 등이 움찔거렸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거짓말해 우유 값을 더 받은 것으로 오뎅을 사 먹었다. 심부름 나온 아이처럼 나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호박이 얼마냐 묻고 그 옆의 생선 가게에서 생선 눈알을 툭툭 건드리며 싱싱한 거냐고 물었다. 상인들은 심부름 나왔니, 물으며 관심을 갖다가 내가 돈을 꺼내는 기색이 없자 짜증내며 쫓아 버렸다. 시장 안이 어둑해질 때야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골목 끝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 박카스를 샀다. 할머니 집 앞에서 박카스를 마시며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곤 대문을 두들겼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마당 구석으로 끌고 갔다.
"지금 몇 시냐? 어딜 쏘다니다 이제 와. 엄마가 시킨 심부름은 하지도 않았지?"
선아 언니가 부엌에서 쟁반을 들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며 나를 쏘아보았다.
"뻔해. 청소하기 싫어 어디서 실컷 놀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나는 선아 언니를 노려보곤 고개를 숙였다.
"말해봐, 어디서 뭐했어?"
엄마는 나를 담 쪽으로 밀었다.
"그 집에 갔었는데 아들밖에 없었어요. 아들이 기다리라고 해서."
"거짓말이 날이 갈수록 느는구나. 그 집에 갔었다고?"
엄마의 두꺼운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올 때, 부엌에서 할머니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담으로 밀어 붙이곤 부엌으로 갔다.
"거기서 반성해라."
- 다음주 토요일 2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은 박정윤 소설가의 단편소설들이 토요일마다 펼쳐질 소설의 정원이다. 첫 번째 단편소설(기차는 달린다)가 끝나면 다른 단편소설이 이어서 연재될 예정이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