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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환상 소녀 4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3-15 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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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담근 고추장을 퍼먹으며 자랐다. 부엉이 울음소리를 무서워하던 일곱 살 소녀가 열한 살, 열일곱 살이 되어 외가를 떠날 때까지도. 

“외숙모, 장독대 고추장 독, 버리지 마세요.” 

새색시였던 외숙모는 내가 숙모 키를 훌쩍 넘게 자라도록 여전히 단정했다. 

“나도 여길 떠날 거야.” 

외삼촌은요? 언제 돌아오실 거죠? 나는 묻지 않았다. 물을 수가 없었다. 농산물 경매 담당 총각은 추수 때면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왔다. 별채 앞마당까지 트럭을 몰고 왔다. 내가 열일곱 살이 되도록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경매 삼촌, 경매 총각이라 불렀다. 작은 키에 몸이 왜소한 그는 뭔가를 가져올 때면 늘 땀을 흘렸다. 

김장철에는 배추와 무, 고춧가루를 가져다주었다. 여름 감자, 옥수수, 사과, 밤. 외숙모가 손짓하는 곳에 가져온 걸 부려놓고 마루에 앉은 내 곁에 앉았다. 소매를 끌어당겨 젖은 이마를 닦으며 그는 내게 말을 걸거나 질문을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은 듣기만 했고 질문에는 네, 아니오, 짧게 답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외숙모는 유독 경매 총각한테는 쌀쌀맞게 굴었다. 곁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의혹 가득한 시선으로 외숙모를 관찰했다. 경매 총각이 올 때면 나는 마루에 나가 앉아 있었다. 

외숙모도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외숙모는 내 짐을 싸다가 손을 멈추고 뒤돌아 산의 어느 지점을 가늠하다 손짓했다. 자신이 죽으면 저기 묻지 말고 불에 태운 후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왜요?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대신 엉뚱한 질문을 했다. 

“뜨겁지 않을까요?” 

“뜨겁겠지. 그래도 바다를 떠다니고 싶어.” 

외숙모는 서쪽 바다에 어떤 절이 있는데 만월이면 암자와 뭍 사이로 바다가 들어와 암자가 바다에 솟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곳에서 공양주 일을 할 것이라 했다. 

‘달이 뜨면 솟아나는 절.’ 

‘환상이네.’

나는 믿지 않았다. 허투루 들었다.

 

외가는 빈집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내가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있는 선산 앞 산중의 검은 기와집. 가계의 내력을 알 순 없지만 대대로 단명했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저수지가 보이고 산안개가 여름 마당을 적시는 빈집을 나는 가끔 떠올렸다. 

초여름이었다. 기술고등학교 운동장 담 밑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화단에서 커다란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는 연분홍 작약을 보았다. 곧바로 외가 뒤란의 작약과 작약에 코를 비비던 외숙모가 떠올랐다. 목을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쪽 허공이 외가가 있는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세수를 했다. 뺨에서 물이 흘러 턱과 목덜미를 적신 줄도 모르고 작약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리운 것을 대하듯 두 손으로 작약 꽃받침을 받쳐 들었다. 노란 수술을 들여다보며 코를 대고 은은하게 번지는 향을 들이마셨다. 

차륵차륵. 물소리가 들려 고개를 듦과 동시에 내 얼굴과 목덜미, 어깨에 물줄기가 쏟아졌다. 나는 화단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돗가에 용접보안면 헬멧을 쓴 남학생이 손을 씻고 있었다. 보진 않았지만, 그가 손으로 수도 구멍을 막아 물줄기가 나를 겨냥하도록 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남학생 앞에 섰다.

“저기요. 젖었거든요?”

키가 큰 남학생이 용접보안면 헬멧 앞 유리를 걷어 올리고 헬멧을 벗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그는 나를, 어깨와 교복 셔츠가 젖어 달라붙은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젖었구나. 너, 일학년이지?”

“아, 네. 선배님.”

나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잊고 고개를 숙였다.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격했고 학생들 사이 폭력과 다툼이 잦은 학교였다.

“그래, 일학년. 잘 말려라. 여름 감기가 무서우니.”

그는 용접보안면 헬멧을 쓰며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의 몸을 닮은 가늘고 긴 그림자가 여름 운동장을 할퀴며 따라갔다. 남은 점심시간 내내 운동장 햇빛 속에 서 있었다. 컴퓨터 수업을 듣기 위해 컴퓨터실에 갔을 때야 젖은 셔츠가 거의 말라갔다. 지정석에 앉아 워드 프로그램을 켜놓고 제시된 서류를 옮기고 있을 때, 비어 있던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수돗가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다. 옷 잘 말랐구나, 난 석영이야. 선배인 줄 알았는데 같은 학년이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같은 교실에 있으면 자주 눈이 맞았다. 

정보처리과인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산업 설비과인 그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그는 철공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철공소 안쪽에 딸린 집에서 단둘이 살았다. 기술고등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억지로 학교를 다녔다. 다니기 싫은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다니기 싫은데 인문계 고등학교 떨어져서, 다니기 싫은데 돈을 벌어야 하니깐, 취업해야 하니깐. 우리는 좀 달랐다. 석영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할아버지 철공소에서 쇳가루를 가지고 놀았다. 그는 선반 작업, 밀링, 드릴링 작업을 신나게 배웠다. 유리, 알곤, 특수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다음주에 6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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