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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미역이 올라올 때 1편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5-23 0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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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다에서 태어났다.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정확히 말하면 솔밭 사이에 있는 방갈로에서 태어났다. 우리의 탯줄은 페인트가 묻은 가위로 잘려졌다. 먼저, 미라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배가 봉긋한 엄마를 재워놓고 방갈로에 가 물을 끓였다. 미리 준비한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꼬박 반나절 동안 기절했다. 미라의 앙칼진 울음소리에 방갈로 건너편 횟집 아줌마가 핏덩어리 미라와 할머니를 발견했다. 엄마는 열한 개의 방갈로를 돌아다니며 페인트를 칠했다. 내가 유별나게 빨리 나오고 싶어 발을 굴렸는지 엄마는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솔밭 사이로 흐르는 초여름 저녁 안개가 엄마의 비명을 삼켰다. 할머니는 쌀을 안치고 엄마를 찾아 나섰다.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갈로 쪽에서 비명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미라를 등에 업은 채 뛰었다. 가누지 못하는 미라의 목이 바람의 방향으로 꺾였다. 할머니는 나의 몸에 휘감겨 있는 탯줄을 페인트가 묻은 가위로 잘랐다. 우리는 할머니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달달 외웠다. 나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미라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미라는 자신이 엄마가 되어 가랑이를 벌린 채 허리를 비틀어 거품을 토해내며 나를 낳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되어 주름과 피투성이 나를 살살 돌려 빼내 페인트 묻은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엉덩이를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비릿한 피 냄새와 독한 페인트 냄새가 났다.


미라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여름이 끝난 바다는 빠르게 움직였다. 상복을 입은 미라가 틀어 올렸던 머리칼을 풀어헤쳤다. 검은 머리칼이 물미역처럼 윤을 내며 길게 펼쳐졌다. 미라는 한 손으로 치마를 모아 쥐고 신발을 벗어들었다. 발목께 물이 닿았다가 하얗게 부서졌다. 치맛자락이 바닷물에 척척 휘감겼다. 초경을 치르기 전까지 우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의 눈을 피해 알몸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은 바닷물에 죄어졌다. 우리의 몸은 점점 엄마를 닮아 매끄러워지고 윤이 났다. 

나는 미라가 지내던 바다로 면한 방으로 갔다. 창 아래 벽에 액자가 기대져 있었다. 창틀에 두 팔을 뻗고 밖을 내다보았다. 소금냄새가 얼굴에 확 뿌려졌다. 방문을 열면 댓돌이 있고 모래사장을 오십 미터 나가면 바다다. 바다로 면한 일곱 개의 방이 일렬로 있고 오른쪽 끝에 공동으로 쓰는 세면장이 있다. 왼쪽으로 할머니 방벽을 따라 돌면 마당이 있고 건너에 부엌이 있다. 미라가 걸어가는 왼쪽, 방갈로가 있던 자리에 콘도가 있다. 낡은 콘도의 외벽엔 금이 갔고 한여름을 제외하곤 방이 찬 적이 없었다. 콘도 건너 도로 쪽에는 화려한 간판의 모텔들이 늘어섰다. 파도가 밀려 왔다가 미라의 발목에 걸려 되돌아갔다. 미라는 신발을 옆에 놓고 모래 위에 앉았다. 미라의 등이 수평선 한 부분을 가렸다. 

벽에 기대 놓은 액자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액자에는 먼지가 뽀얗다. 흉이 진 이마를 머리칼로 가린 미라의 얼굴에 드문드문 빨간 꽃이 피어 있다. 똑같이 빨간 원피스를 입은 우리는 양손으로 원피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다. 미라가 앓아누웠던 여름, 나는 방갈로 손님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라는 목화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문을 열었다. 나는 미라의 시야 안에서 혼자 고무줄을 타넘었다. “너는, 나를 혼자 두면 안 돼.” 미라의 이마에는 사선의 상처가 빨갛게 불거졌고 볼에는 빨간 꽃이 가득 폈다. 홍역을 앓던 미라의 얼굴에 붉은 꽃이 거의 사라졌을 때 우리는 할머니가 시내에서 사온 소매 없는 원피스를 입고 바다로 나갔다. 모래사장에서 사진 기사를 찾아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와 할머니를 졸라 사진을 찍었다. 해바라기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머리칼에는 모래사장에서 주은 큐빅 빠진 머리핀이 꽂혀 있다. 사진 값을 흥정하느라 화가 난 할머니의 통통한 볼과 이마 위로 싱싱한 햇살이 빛났다. 할머니는 젊었고 화려했다. 늘 검게 머리를 염색했고 바닷가 여자답지 않게 짙은 화장을 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좋아한 할머니는 옥수수를 사다 삶아서 방갈로마다 들이밀곤 했다. 빨간 함지에 감자를 담아 놓고 우리에게 숟가락으로 긁으라 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쟁반에 담아 준 감자전을 들고 방갈로를 들락거렸다. 

커다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그 동안 미라가 이곳에 두고 갔던 책과 편안한 셔츠, 잠옷까지 모두 들어 있다. 얕은 숨을 내뱉으며 창밖을 볼 때 수평선을 가리고 앉아 있던 미라가 일어나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는 트렁크를 닫고 액자를 바로 세워두고 할머니 방으로 갔다. 미라는 수돗가에서 치마를 모으고 앉아 걸레를 빨았다. 걸레를 들고 자신이 지내던 방으로 갔다. 미라가 댓돌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 방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뼈를 뿌리자고 말했다. 

“파도가 심해, 오후에 잠잠해지면.” 

할머니는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미라는 유골분을 뿌리고 바로 떠나겠다고 했다. 배를 부탁해 놓은 김 씨는 오늘 바람이 좋은 날이라 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십 리만 나가면 되지 않겠어?” 

나는 김 씨에게 오후에 나가자고 했다. 장롱을 열어 할머니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옷은 붉은 계열이 많았다. 속옷도 붉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색이 바래지고 고무줄이 늘어난 것도 있고 천 사이로 와이어가 빠져 나온 브래지어도 있었다. 화장대 서랍 안의 영수증과 수첩을 살피고 집어넣으려는데 서랍이 닫히지 않았다. 서랍을 통째로 빼내고 걸린 것을 꺼냈다. 공책이었다. ‘뼈가 드문드문 씹히는 날 가자미의 생선 살, 김 위에 뿌려 놓은 소금.’ 방갈로의 낙서를 적어 놓은 파란 볼펜이 번져 있었다.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나는 이 공책을 잃어 버렸다. 무언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여겨졌다. 엄마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오징어를 떼어다 말려야 했고 미역을 손질해야 했다. 여름철에는 도로 건너편 횟집에서 회를 쳐놓은 생선살을 펼쳐놓았고 고추장과 생선 기름이 미끈거리는 접시를 씻기도 했다. 민박 손님은 인근에 모텔 촌이 형성되면서부터 줄어들었다. 할머니가 살얼음이 낀 항구에서 넘어진 뒤부터는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몰랐다. 마당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 마당으로 향한 문을 열었다. 미라는 마당 한복판에 드럼통을 끌어다놓았다. 미라에게 공책을 내밀었다. 미라는 공책을 넘기다 중간을 찢어 둘둘 말아 불을 붙였다. 미라의 손에서 공책을 빼앗았다. 파란 볼펜으로 적은 종이에 불이 파고들자 글씨는 파랗게 번졌다가 금세 검은 재로 변했다. 미라는 드럼통에 할머니의 옷을 놓고 석유를 뿌렸다. 석유 냄새가 나자마자 불길이 위로 치솟았다. 나는 할머니의 알록달록한 옷가지를 드럼통에 넣다가 곤색 스웨터를 들고 망설였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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