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소요 1편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8-16 00:00:01

기사수정

무엇을 보았니, 무서운 것을 보았어요, 그건 꿈이란다, 그러니 어서 꿈에서 빠져나오렴, 어떤 꿈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저기 무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날아가는 새가 보이니, 저렇게 뒤처진 새가 나쁜 꿈을 물고 날아갈 거야, 새에게 말해버려, 그리고 잊어라, 아이였을 때, 섬 근처에는 바닷물이 빠지는 끝 썰물이면 바다 가운데 모래언덕이 많이 생겨났어요, 모래언덕은 학교 운동장만큼 컸다가 들물이 시작되면 점점 작아졌어요, 그러다 만조 때면 바닷속에 잠겨버리는, 환상 같은 모래언덕이었어요, 섬주민들은 그것을 풀등이라 불렀어요, 언제부터인가 해안 근처에 모래를 퍼 담아 가는 배가 나타났어요, 배는 모래를, 모래를 계속 펐어요, 여자는 해안가에 앉아있었어요, 절망을 삼킨 것처럼 고개는 허공을 향해 쳐들었고 입은 저절로 벌어졌어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사라졌어요, 바다와 모래를 아무리 뒤적거리고 파헤쳐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바보천치가 되었다. 감각은 굳었고 지각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무엇을 봐도 생각과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시퍼런 바다가 날 것으로 들이닥쳤다가 모래사장을 훑고 빠져나가는 섬에서는 달의 인력을 헤아려 12시간 25분 주기로 물때를 계산했고 먼 바다에 서성이는 구름의 꼬리만 봐도 비의 시간을 예측했다. 좌대낚시를 위해 섬을 찾아온 이들에게 끝썰물과 초들물 시간을 알려줬고 낚싯대를 손봤고 쭈꾸미와 미꾸라지로 미끼를 준비했다. 황금 물때면 바다의 조류를 헤아려 그물을 던지는 아버지의 손길에 젓새우가 얼마나 끌려올지 우럭이 얼마만큼 잡힐지 예상했다. 장소가 나를 변화시켰다. 아니다, 장소가 아닌 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난 소요 때문이다. 붉은 양산을 쓴 여자의 손을 잡고 섬으로 왔던 빼빼 마른 몸을 휘청거리며 얼굴을 숙이던 소년, 소요 때문이다. 지금의 소요가 아닌, 소년이었던 소요 때문에, 그 소요의 손을 잡고 서너 시간 후면 바다 속에 잠길 모래 언덕을 파닥거리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나 쩔쩔매는 나는 바보천치가 되었다.

소나무에 기대 물을 바라보았다. 인디언 카누를 타고 있는 연인들이 내가 서 있는 구역을 지나쳐 갔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원래, 바다였다. 이곳 역시 하루에 두 번씩 만조와 간조가 생기던, 먼 바다의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가 빠지며 물고기를 이끌던 바다였다. 어디 바다에서 모래를 펐을까. 얼마만큼의 모래를 퍼부으면 바다를 메워 도시가 될 수 있을까. 바다를 매립 해 건설한 신도시의 공원에는 인공으로 이 킬로미터 길이의 강을 만들어 놨다. 바다였던 곳을 메웠다가 다시 그곳을 퍼내고 물을 채워 만든 강은 깊은 곳부터 서서히 원래의 바다와 경계를 허물고 내통할지 몰랐다. 내통되는 통로를 따라 물이 밀고 들어와 도시 전체가 바다에 잠기는 상상을 했다. 유독 이 공원 주위에는 층수를 헤아릴 수 없는 높은 빌딩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높은 빌딩을 견뎌낼 만큼의 지반을 다지기 위해 퍼부어졌을 모래를 헤아리다 어지럼증이 났다. 강 중턱 기슭에는 토끼 숲을 조성해놓았다. 조악한 나무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흙으로 도톰하게 만든 언덕에 구멍을 파놓았다. 토끼는 호기심 없이 인형처럼 앉아 몸을 움츠렸다. 새로운 굴을 파지 않았고 숲 관리자가 파놓은 굴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카누에 올라 중심을 잡은 후 주황색 구명조끼를 벗었다. 출발지점에서 안전요원이 호각을 불며 구명조끼를 입으라 했지만, 여자는 못 들은 척했다. 여자를 마주 보고 앉은 남자가 노를 저었다. 거스를 것 없이 카누는 곧바로 중류로 내려왔다. 선착장 본부에서 무전이 왔다. 나는 호각을 불고 여자에게 구명조끼를 착용하라고 말했다. 여자는 양팔을 휘저으며 수영하는 포즈를 취했다. 수영을 잘한다는 표현 같았다. 인공으로 만든 강은 깊이가 삼 미터도 되지 않았고 강폭 또한 오 미터를 넘지 않았다. 카누가 뒤집혀도 강 둘레에 배치된 다섯 명의 안전요원 중 누군가 뛰어들어 구조할 것이었다. 인디언 카누는 캐나디언 카누와 달리 본체가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져 노를 젓기 힘든 반면 배가 뒤집히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계속-


박정윤 소설가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70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한민국 수출이 AI 열풍을 타고 7000억 달러 벽을 넘으며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이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일평균 수출도 26.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대외 악재를 뚫고 이뤄낸 성과다.무역수지는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연간 780..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비빔국수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꽃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