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가 멈췄다. 호각 소리를 들으며 나는 쇠 받침대에서 뛰어내려 진행 방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열차 바퀴 앞 열차 사이 쇠사슬로 연결된 곳에 쪼그리고 앉아 토했다. 어느새 나를 따라 나온 민석이 할머니의 가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입을 닦다 손수건에 배인 생선 비린내에 다시 속이 뒤집혔다. 시큼한 신물까지 쏟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물이 고인 눈을 닦자 뿌연 시야 사이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시커먼 터널 안으로 도로 들어간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검었다. 산을 파헤쳐놓은 탄 장에는 검은 폐석이 흘러내릴 기세로 쌓여 있었다. 검은 석탄 물이 흐르는 천변 위로 시멘트 다리를 세워 그 위에 다닥다닥 집을 이어 붙였다. 낯설고 아슬아슬한 집 허공에 널어놓은 빨래마저 검었다. 검고 빽빽한 공간으로 눈마저 내려 어지러운 그곳을 나는 홀린 듯 보았다.
“각중에 뭔 눈이 이래 내리나. 춘분도 지났고 오동나무에 꽃 피는 청명인데. 가방 잘 간수하고 있어라.”
영주행 완행열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출발하자 할머니는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제복 차림 역무원에게 다가갔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을 피해 승객들은 잰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민석과 나만 비닐 차양이 쳐진 플랫폼에 남았다. 역무원과 말을 하던 할머니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한 손으로 허공의 눈을 휘저으며 역무원 사무실로 들어갔다. 민석은 몸을 수그려 양손으로 가방을 하나씩 잡았다. 나는 가방 제일 위에 놓인 둘둘 말린 신문지를 보자 다시 속이 뒤집혔다. 내가 웩, 거리며 몸을 웅크리자 내 등을 두드리던 민석이 점퍼 지퍼를 열고 기차 안에서 계속 내밀었던 그것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나는 그것을 받아 껍질을 까고 입에 넣었다. 입에 고여 있던 시큼한 맛을 청포도 향의 사탕이 밀어냈다. 할아버지 약봉지가 담긴 바구니에 놓여있던 사탕이었다. 나는 청포도 맛 사탕을 물고 흰 눈 얼룩으로 덮고 있는 무연탄 창을 바라보았다. 쌓이지 못하고 자분자분 떨어지는 눈이 검은 탄창을 오히려 지저분하게 만들어놓는 것 같았다.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재빨리 열차가 나아갈 순방향 창가 자리에 앉았다. 민석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큰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하나는 바닥에 내려놓곤 창밖을 내다보곤 거꾸로 앉으면 어지럽다며 우리 둘 중 한 명을 맞은편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민석의 어깨를 밀치며 맞은편으로 가 앉으라는 눈짓을 했지만, 그 애는 엉덩이를 움직여 녹색 천을 덧씌운 의자 깊숙이 파고들어 앉았다. 나는 민석을 흘겨보곤 맞은편 창가에 앉았다. 민석도 발딱 일어나 내 곁으로 옮겨 앉았다. 보풀이 일어난 겨울용 스웨터를 벗는 할머니 곁으로 가라는 표시로 나는 그 애의 옆구리를 쳤다. 민석은 씨익 웃으며 점퍼 가슴께 있는 주머니 지퍼를 열었다. 점퍼는 할머니가 어제 시장에 가 사 온 거였다. 민석이 움직일 때마다 점퍼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새 옷에서 석유 내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신경이 쓰였고 석유 내에 속이 메슥거렸다.
“볼래?”
민석은 풍선껌과 함께 들어있는 조악한 만화책을 꺼내 보였다. 나는 대답 없이 창가로 고개를 홱 돌렸다. 민석은 만화책을 제 눈앞에 바짝 붙이고 키들거리며 웃었다. 기차가 안인역에서 출발했다. 곧 캄캄한 터널 안으로 들어갈 거였다. 나는 몸을 창가로 바짝 붙였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바다가 펼쳐질 거였다. 나는 강릉에서 묵호 구간을 많이 다녀서 창가 풍경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하나, 둘, 셋.
“우아아아. 바다다.”
민석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소릴 질렀다.
“촌스럽게 좀 굴지 마.”
민석은 내 곁에서 조금 떨어져 앉는 기척을 내며 가슴께 지퍼를 열곤 내 어깨를 툭 쳤다. 사탕을 꺼내 보여줬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다시 어깨를 툭 쳤다. 한 손에는 사탕을 한 손에는 풍선껌을 들고 고르라는 듯 시늉을 했다.
“안 먹는다고. 너 지금 어디 가는 줄 몰라?”
할머니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민석의 손에서 풍선껌을 집으며 속을 그래 못 쓰다간 속이 뒤집히지, 라고 말해 나는 정말 속이 뒤집힐 듯 약이 바짝 올랐다. 기차가 바위 사이로 거칠게 파도치는 정동진을 지나갔다. 역방향으로 앉아 바다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닌, 바다를 밀어내며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를 거꾸로 바라보는 것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빼면 나쁘지 않았다. 옥계역을 지나 넓은 해변과 소나무 숲 사이로 방갈로가 보이는 망상을 지나쳤다. 망상역은 한여름 피서철이 아니면 타고 내리는 승객이 없어 그냥 지나치는 곳이었다. 기차가 묵호역에 도착하자 나는 건너편 창으로 발한동 철도 관사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고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엄마와 언니들이 살았다. 원래 그곳에서 모두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가 5급 역으로 승격한 철암역으로 발령받았다. 엄마는 관사 사택 빈방에 결혼 안 한 총각 역무원 하숙을 친다는 이유로 나와 민석을 할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학교에 들어갈 때 데리러 온다고 말했던 엄마는 내가 할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학교로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오질 않았다. 주로 할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발한동 관사로 찾아갔고 명절이나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면 엄마와 언니들이 할아버지 집으로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계속-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