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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넘치는 복福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6-03-22 0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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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우리 집에 복이 많았다. 숟가락에도 福, 주머니에도 福, 베개에도 福, 횃대보에도 福, 옷고름에도 福, 머리댕기에도 福, 저고리소매에도 금박으로 물든 福이 있었다.


눈만 뜨면 福과 함께 살았지만 한 번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복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福자가 찍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어도, 福자를 수놓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다녀도  늘 배가 고팠다.


발끝만 까닥거려도 '복 나간다' 잔소리 많은 엄마는 우리 집에 사는 복이 달아날까 늘 걱정이셨다.


-마경덕 시인의 '넘치는 복福' 전문



마경덕 시인이 쓴 에세이집 《봄의 문턱을 넘어온 포로들》에 실린 글이다. 시처럼 짧으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잘 읽힌다.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쉬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福'이 들어간 사물들이 많았다. 눈만 뜨면 福과 함께 살았지만 대부분 가난하게 지냈던 시절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쓴 '구조언어학'에는 외부적으로 표기되는 '기표(記票 signifiant)'와 표기되는 말의 의미를 뜻하는 '기의(記意 signifié)'가 나온다. 그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늘 미끄러지며 변형을 일으킨다고 한다. 


화자의 집에도 "福"이라는 기표가 넘쳐도 아이러니하게 '풍요'나 '행복'을 의미하는 "복"에는 가닿지 않는다. 한 번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늘 배가 고팠다. 오히려 어머니는 그 이름뿐인 福이 달아갈까봐 발끝도 까닥거리지 못하게 하신다. 이런 간극들이 결국 결핍이 되고 욕망을 불러온다.


어쩌면 "福"이라는 기표는 어머니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가족과 함께 암담한 현실을 견뎌나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자식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라는 바람을 담고 있는 건지도.


가난을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위트와 담담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의미를 만들게 하고 감동까지 선사하는 글이다. 슬퍼도 웃게 된다. 


어향숙 시인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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