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잇지 못했다 떨어뜨린 모양이야 그러나,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너는 물어보지 않는다 있어 그런 말이 하고 대꾸할 것 없이 그냥 주워야 하는데 그 말은 아주 까맣고 지금은 너무 밤이야 깜깜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쪼그려 앉으려다 말고 바닥을 더듬대는 심정 찾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떨어진 것은 숨어버리니까 하지만 볼 수가 없구나 다른 누가 그 말을 주우면 어쩌나 주운 그것을 주머니에 쓱 넣고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더 깜깜한 밤으로 가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으나 걱정은 말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대답도 될 수 없고 말과 말을 이어주지도 않는다 잇지 못한 저편에 너는 아직 말이 없다 너도 떨어뜨렸나 떨어뜨려 잇지 못하고 있나 그 말은 어떤 색일까 딱딱해서 바닥 위로 튀어 올랐다가 도르르 책상 아래로 까만 어둠 속으로 굴러간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한참 나는 그대로 있었다
-유희경 시인의 시 '지독한 현상' 전문
이 시는 유희경 시인의 시집 《이다음 봄에 우리는》에 실려있다.
가끔 마음과 달리 "말"이 먼저 나와 상대방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할 때가 있다. 입 밖에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만약 "너"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하고 물어준다면 대꾸라도 할 텐데 물어보지 않는다. 다른 누가 그 말을 주워 듣기라도 했을까 걱정도 된다. 그 걱정은 말이 될 수 없고 말과 말을 이어주지도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이 생각난다. 말하는 순간, 말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며 의미는 언제나 미끄러지고 지연된다고 했다. 우리가 차마 하지 못한 말들, 말하려다 삼킨 말들은 의도와 달리 숨어버린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불안한 가운데 화자는 문득 "말"에 대해 엉뚱한 상상을 한다.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뜨린 무엇처럼 물질성을 부여한다. 의미보다는 색이나 질감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래서 너와 함께 감각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시인의 재밌는 상상은 "지독한 현상" 앞에서도 독자를 말랑말랑한 시간으로 이끈다. 다 말하지 않아도, 다 전해지지 않아도 "말" 이전의 "진심"을 헤아리게 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