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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 쓰는 소리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6-01-18 00:48:12
  • 수정 2026-01-18 01: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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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욕심이 하나 있다면 겨울날 식전에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 쓰는 소리를 이불 속에서 가만히 듣는 것

  그 소리는 빈 논의 살얼음을 누군가 맨 먼저 밟고 또 그 뒤를 이어 밟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하얗고 아득하였는데

  나는 그 소리를 귀에 조금 넣어두고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가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 쓰는 일은 마당에 없던 연못을 들여놓는 일이고 연못의 수면을 닦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연못은커녕 고샅길에 빗자루 지나간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살았는데

  아버지의 헛기침처럼 빗자루로 쓸어낼 만큼만 눈이 내린 아침.

  나는 눈을 쓸러 나가며 어찌하여 또 우쭐해져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를, 허명이 지워지고 문장이 오기를, 하고 욕심을 부려보는 것인데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을 쓰는 동안 부엌에서 뭇국이 끓었던가 냄비 속에도 눈이 내려 길이 자욱했던가

  빗자루로 눈 쓰는 소리 엿듣다가 딱새 한 마리 밤의 이마에 붙어 있던 자잘한 씨앗들을 쪼아먹는다


-안도현 시인의 시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 쓰는 소리' 전문



안도현 시인의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에 실린 시다.


며칠 전 아침처럼, 일어났는데 눈이 하얗게 온 세상을 덮고 있으면 아이처럼 좋아하다가 곧 출근길을 걱정하게 된다. 그러다가 시처럼 겨울날 식전 이불 속에 누워 가만히 듣던, 듣다가 까무륵 잠들기도 했던, 아버지가 마당에서 싸리비로 눈쓰는 소리가 쓱쓱 온다. 그 시간 엄마는 부엌에서 맑은 뭇국을 끓이고 계셨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의 수고로 우리가 지나는 길에 위험이 사라지고, 갈등이 줄고, 하루가 무사히 시작된다는 것을. 두 분의 사랑은 늘 앞서 갔다. 마당에 없던 연못을 들여 놓고 연못의 수면을 열심히 닦는 일과 같이 언제나 자식들 삶이 잔잔하게 유지되기를, 그 깊이가 잘 드러나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밤의 이마에 붙어 있는 자잘한 씨앗들을 쪼아먹는 "딱새" 처럼 그분들의 보이지 않고 사라진 수고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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