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11-29 23:10:10
  • 수정 2025-12-01 00:12:50

기사수정


투명한 보울 속에 검고 파랗고 노란, 붉디붉은 것들이 봄날의 꽃밭처럼 담겨 있다. 겉도는, 섞이지 않는, 차디찬 것들. 뿌리 뽑힌, 잘게 썰어진, 뜯겨진 후에도 기죽지 않는 서슬 퍼런 날것들, 정체불명의 소스 아래 뒤범벅이 되어도 각각 제 맛인, 제 멋인, 화해를 모르는 화사한 것들. 불온했던, 불안했던, 그러나 산뜻했던 내 청춘 같은 샐러드, 샐러드라는 이름의 매혹적인 불화 한 그릇 입속으로, 밑 빠진 검은 위장의 그릇 속으로, 생생히 밀려 들어온다. 나, 언제나 소화불량이다. 그 체증의 힘으로, 산다. 나는. 여전히, 내내, 붉으락푸르락 샐러드.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 


-강기원 시인의 시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 전문   

           


이 시는 강기원 시인의 시집 《지중해의 피》에 실려있다.


투명한 보울 속에 담긴 샐러드를 보며 시인은 "봄날의 꽃밭"을 떠올린다. 아마도 투명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기 쉽고 더 취약할 수 있지만 그래도 섞이지 않고 고유한 빛깔과 맛을 유지하며 "각각 제 맛인, 제 멋인, 화해를 모르는" 그 화사한 샐러드에서 "불온했던, 불안했던, 그러나 산뜻했던 청춘"을 만난다.


그 "검고 파랗고 노란, 붉디붉은 것들"은 한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수많은 감정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이러한 "겉도는, 섞이지 않는, 차디찬 것들"을 단순히 고통이나 결핍으로 묘사하지 않고 각자 살아가는 존재 방식으로 표현한다. 더 나아가 소화불량처럼 불편한 감정들조차 그 "체증의 힘으로 산다"고 말한다.


가끔 어떤 일에 부딪히면 우리는 불안해하고, 오히려 그 불안 때문에 더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쓴 '스피노자의 뇌'를 읽으면 "불안"을 운동하는 뇌의 방식이라고 서술한다. 고정된 자아를 거부하고 관계망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찾는 역동적인 '정동(affectus)'이라 표현했다. 따라서 시 속의 샐러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섞이기를 거부하는 '정동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행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라고 화자는 체념이 아닌 자기 인정을 한다. 그 다양성을 억압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이며 "불안"이야 말로 삶을 계속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샐러드를 먹을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고 또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낼 것 같다. 참 군침도는 맛있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한국은행 소비자동향] 2026년 1월 소비심리 훈풍…'집값·금리 상승' 전망도 꿈틀 2026년 새해, 소비 심리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0.8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달보다 1.0포인트 오른 수치로 이 지수가 100을 넘으면 소비자들이 경제 상황을 과거 평균(2003~2025년)보다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지수를 끌어올렸다. 6개월 전과 비..
  2. [수출입동향] 2026년 1월, 수출 6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끌고 미국·중국 밀었다 대한민국 수출이 2026년 새해 첫 달부터 유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26년 1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1월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33.9%나 급증한 658.5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역대 1월 수출 중 처음으로 600억 달러 선을 돌파한 실적이자 8개월 연속 해당 월의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운 수...
  3. [경제포커스] 연봉 올랐는데 실수령액은 그대로?…2026년 건보료·국민연금 동반 인상 김당황 씨는 지난달 연봉협상에서 5% 인상이라는 기분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1월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실수령액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연봉은 올랐는데 통장에 들어온 돈은 지난해 12월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월 월급날을 예상한 김 씨의 스토리다. 새...
  4. [한국은행 국내총생산] 2025년 GDP 1% 턱걸이 상승…4분기는 0.3% 감소 실질 GDP 속보치는 분기 마지막 월의 실적 자료를 모두 이용하지 못해 추후 공표할 GDP 잠정치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한국 경제가 2025년 연간 1.0% 성장을 힘겹게 달성했다. 웃을 수만은 없는 성적표다. 한국은행이 22일 발표한 '2025년 4/4분기 및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속보)'에 따르면, 지난 4분기 실질 GDP는 전기 대비 0.3% 감소하며 '역성...
  5. [아이즈인터뷰] 정우신 시인, 불확실한 미래 그려내는 섬세한 상상력 안녕하세요? 시간 내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초대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에 앞서 가벼운 질문드립니다. 요즘 어찌 지내시고 계신가요?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듯 언제나 제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일상에선 주어진 삶의 시간이 허비되지 않도록 루틴을 만들어 수...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