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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새우탕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11-23 00:53:40
  • 수정 2025-11-23 0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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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 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 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 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추억의 수위는 수평선을 넘나들고 앗, 끓는 바다를 맨 입술로 그 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그 날도 노을빛이 퍼졌다 그 흔적, 바다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바다에 추억을 데이고, 입안이 까실하다 텅 빈 용기 안, 수평선이 그을려 있다


-안시아 시인의 시 '새우탕' 전문



안시아 시인의 시집 《수상한 꽃》에 실려있는 시다.


이 시를 끌고가는 중심은 "수평선"이다. 컵라면의 '물선 표시'가 "수평선"으로 인식되는 순간 "바다"라는 공간이 오고 기억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끓는 물은 삼분 만에 만조가 되어 용기 속 말라붙은 내용물과 건조된 시간을 출렁이게 한다. 분말스프는 노을빛으로 번지고 면발은 물결이 되고 새우는 휜 허리를 편다. 


그때의 바다처럼 끓는 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수평선을 넘나들며 끓는 면을 맨 입술로 "그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끓는 점"은 과학적 수치이지만 시에서는 '심리적 임계'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애도일기>에서 '사랑은 단 1그램의 감정으로 전체를 뒤흔든다'라고 했다. 기억 만으로도 추억을 데이고 입안을 까실하게 한다. 그날의 감정을 호출하고 몸의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텅 빈 용기 안에 수평선이 그을려 있"다. 부재 속에서도 흔적은 남아있고 그 흔적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면서 물질적 상상력을 펼치고 이미지들을 형상화해가는 시인이 그려진다. 참 맛깔스러운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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