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새책] '나는 내 몸이다' 선언한 메를로-퐁티 역작 《지각의 현상학》
  • 정해든 기자
  • 등록 2025-12-01 14:25:38

기사수정
  • - 몸과 세계의 모호한 경계, 23년 만의 재번역
  • - 난해한 프랑스 현상학, 가장 선명한 우리말로
  • - 예술과 과학에 영감 주는 '지각'의 재발견

모리스 메를로-퐁티 자음 / 주성호 옮김 / 세창출판사 / 42,000원


우리는 어디서 끝나고 세계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성 중심의 철학이 놓친 '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내 몸이다'라는 강렬한 선언과 함께, 추상적인 정신이 아닌 구체적인 신체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한 책이 돌아왔다.


세창출판사에서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펴냈다. 세계에 '몸담은' 인간과 '지각된'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역작이다.


이 책은 인간과 세계의 모호한 경계를 '몸'과 '지각'이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규명한다. 23년 전 소개된 후 난해한 번역으로 아쉬움을 남긴 원전을 새롭게 번역했다. 


옮긴이 주성호 교수는 프랑스어 원전을 바탕으로 영어, 독일어, 일본어 4가지 판본을 6년간 교차 검토하며 오역을 바로잡고 정확도를 높였다. 


메를로-퐁티 특유의 끝없이 이어지는 늘어지는 긴 문단을 독자가 호흡하기 좋게 나누고, 원서 목차에만 있던 소제목을 본문 적재적소에 배치해 가독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책은 크게 몸, 지각된 세계, 대자존재(의식)와 세계 3부로 구성해 인간 존재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1부에서는 기계론적 생리학을 비판하며 성적 존재이자 표현하는 주체로서의 '몸'을 다루고, 2부에서는 감각과 공간, 사물과 타인 등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의 구조를 파헤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코기토(생각하는 나), 시간, 자유를 논하며 인간이 어떻게 세계 속에 존재하며 자유를 실현하는지를 철학적으로 규명한다.


메를로-퐁티는 "내부와 외부는 분리될 수 없다. 세계는 전적으로 내부에 있고, 나는 전적으로 내 외부에 있다"며 안과 밖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그에게 몸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원초적인 통로이자 주체다.


저자는 "나는 헤겔의 말처럼 〈존재 속의 구멍〉이 아니라, 만들어졌다가 해체될 수 있는 웅덩이, 주름이다"라며 인간 존재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이 책이 메를로-퐁티 철학을 정확히 들여다보게 하고 그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회화, 무용, 건축 등 예술 분야 창작자들에게 이 책은 이론서를 넘어 창작의 원천이 될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프랑스의 로슈포르쉬르메르에서 태어났다. 1945년 리옹대학 철학교수, 1949년 소르본대를 거쳐 1952년 콜레주 드 프랑스 철학교수로 임명됐다. 장 폴 사르트르와 《현대》지 객원 편집자로도 일했다. 1947년 소련 공산주의를 세련되게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논문집 《휴머니즘과 테러》를 발표했다. 메를로 퐁티의 사상의 핵심은 몸 현상학 또는 몸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인식론이다. 그의 철학은 구조주의와 해체론 등 현대철학의 주요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행동의 구조》《지각의 현상학》《변증법의 모험》《의미와 무의미》《기호들》 등을 썼으며, 사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눈과 정신》 등이 출간됐다.


주성호는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에서 「메를로퐁티의 신체론에 관한 고찰」로 석사학위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메를로퐁티, 베르그송주의자?: 메를로퐁티 철학의 형성과 ‘베르그송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 「심신문제를 통해 본 메를로-퐁티의 몸 이론」「세잔의 회화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공저로 《마음과 철학》이 있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3. 2025년 포엠피플 신인문학상 주인공 22세 이고은 "시 없인 삶 설명 못 해" 올해 《포엠피플》신인문학상은 22세 이고은 씨가 차지했다. 16일 인천시인협회 주관하고 인천 경운동 산업단지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351편의 경쟁작을 뚫고 받은 것이다. 행사 1부는 《포엠피플》 8호 발간(겨울호)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2022년 2월, 문단의 폐쇄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회원들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기치 아래 창간된 계..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같은 부대 동기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텐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진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
  5.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새우탕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 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 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 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