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11-09 04:51:10
  • 수정 2025-11-10 10:50:25

기사수정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

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


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

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

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

새벽바람에 잔가지 서로 부딪던 소리라 하고

첫서리 내려앉던 아침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라 하고


면봉으로 조심스레 그것들을 끌어내니

온갖 소리들 잠잠하다

구멍이 깊다


구멍 속에서 노란 벌레 한 마리가

향내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영선 시인의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전문


이 시는 이영선 시인의 시집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에 실려있다.


요즘 모과나무 있는 곳을 지나다 보면 낙과가 많이 보인다. 그래서 이 시가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시인은 "모과에 핀 얼룩"과 "사람의 얼굴에 핀 검버섯"을 동일시 한다. 이것은 보기 흉한 결점일 수도 있지만 시인은 "반짝거린다"고 표현했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모든 것이 낡고, 변하고, 사라지지만 그것은 존재가 시간 속에 남긴 존엄한 기록일 것이다. 반짝거리는 생명의 흔적인 것이다. 그 귓구멍 같은 얼룩의 깊은 구멍 안에는 그동안 살아온 온갖 소리가 들어있다. 소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들을 끌어낸 "구멍 속에서" 어린 노란 벌레 한 마리가 자신이 지나온 사막을 건너는 것이 보인다. 그 사막이 비록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노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향내 가득한 여정일 것이다. 단순한 자연 풍경을 넘어 세대의 연속성을 읽게 된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책에서 '진리는 은폐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그 은폐된 공간은 '동굴'이나 '구멍'을 뜻한다. 시를 읽다 보면 독자는 그 모과 "구멍 속에서" 다른 생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존재의 끊임없는 순환을 마주하게 된다.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2. [가계대출동향] 2025년 '빚투 브레이크'...가계대출 37.6조 ↑로 증가폭 둔화 지난해 대한민국 가계부채가 다소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2025년 가계대출 동향'(잠정)에 따르면,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37.6조 원 증가했다. 2024년 증가폭 41.6조 원보다 4조 원가량 줄어든 액수로 연간 증가율은 2.3%를 기록했다.정부의 일관된 가계부채 관리 강화 기조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며 GDP 대비 가계부채비...
  3.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4. [한국은행 소비자동향] 2026년 1월 소비심리 훈풍…'집값·금리 상승' 전망도 꿈틀 2026년 새해, 소비 심리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0.8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달보다 1.0포인트 오른 수치로 이 지수가 100을 넘으면 소비자들이 경제 상황을 과거 평균(2003~2025년)보다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지수를 끌어올렸다. 6개월 전과 비..
  5. [새책] 《돈의 심리학》 잇는 모건 하우절 신간 《돈의 방정식》···어떻게 벌고 쓰고 다룰 것인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의문이다. 수백억 연봉을 받는 NBA선수들은 왜 파산하며, 3000억 달러를 가진 명문가는 어째서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서삼독에서 《돈의 심리학》 《불변의 법칙》 저자 모건 하우절의  《돈의 방정식》을 펴냈다. 저자는 '부=가진 것-원하는 것'이라는 통찰력 있는 정의를 통...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