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비의 음률' 3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1-25 00:00:01
  • 수정 2025-01-31 12:40:11

기사수정


헌, 이라는 관형사는 오래되어 성하지 아니하고 낡은 것을 뜻했다. 사전적 의미였지만 나는 정확한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헌 것이라고 모두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책에 관해서는. 같은 책이 단지 낡고 헌 것이 되었다고 그 안에 품고 있는 내용이 낡거나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겉과 표면이 낡았지만 취하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품고 있는 속은 더욱 빛날 수도 있었다. 잘 닦아 길을 들여놓은 거울처럼. 나는 기억나지 않은 오래전부터 새 제품이라는 말 못지않게 헌책방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렸을 때 이 골목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방이 있었다. 책방 사이사이에 문구용품 대리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공장 기계에서 방금 빠져나온 새 제품의 문구용품이 있었다. 나는 빠닥빠닥 거리는 플라스틱 새 제품의 촉감보단 낡고 오래된 책갈피를 넘기는 감촉이 좋았다. 눅눅한 것은 눅눅해서 좋았고 바싹 마른 종이는 바싹거려서 좋았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가져다준 낚시용 비닐 의자를 책더미 사이로 옮기며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언제 어떻게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기 전부터 늘 책더미 속에 있었다. 그들도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어느 날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은 그전에도 있었을지 몰랐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당시 나는 전기문에 빠졌다. 사람의 생몰년 대를 계산하며 인생 행로를 따라가면 나 또한 여러 인생을 살아가는 경험을 했다. 어떤 위대한 사람, 아름답거나 극빈한 사람, 고통을 겪는 사람도 결국 한 세기를 다 못 살고 죽었다. 모든 책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린이용 전기문을 모두 섭렵했을 때는 성인용 책을 꺼내 날개에 있는 저자의 생몰년 대와 간단한 약력을 읽었다. 몇 줄로 요약되는 저자의 생을 알고 두꺼운 책 제목을 보면 비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떤 책은 책 뒷부분에 저자의 약력을 좀 더 길게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나는 책의 저자들 생몰년 대를 헤아리다가 점점 강력한 죽음에 끌렸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권총 자살, 몸에 돌을 매달고 강으로 들어간 여자, 행려병자로 길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여류화가, 매독과 정신병에 걸려 죽은 사람, 할복자살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6년 4월 26일 일본계 아르헨티나인 여비서 마리아 고따마와 결혼했다.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한 그는 결혼한 지 50일 만에 죽었다. 책 표지는 검은 바탕에 심플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선과 빨간 원, 아이의 손 글씨로 쓴 것 같은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전집이었지만 책방에 들어와 있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기억』과 『불한당들의 세계사』 두 권이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한, 실명으로 한쪽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보이는 노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책방으로 부인 두 명이 들어왔다. 대체로 책방을 찾는 이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책을 가지고 온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말없이 서가를 둘러보는데 그들은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호명하며 아버지를 찾았다. 간이 사다리 위에 있던 아버지가 황급히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아버지는 나를 그녀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키가 훌쩍 컸군요.” 

“네, 책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녀들은 카운터 앞에 서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책을 읽는 척했지만, 신경이 온통 그들에게 가 있었다. 

“애 엄마가 먼저 가고 난 후 그 제안에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럼요, 힘든 시기셨어요. 저희는 선생님의 결정을 존중해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주 잠깐 모두 침묵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모르는 것 같군요.” 

“네, 조만간.” 

그들이 책방에 머문 것은 십 분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녀들 앞에서 벌 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모았다가 머리를 긁적였고 커피를 대접하려 했지만, 그들이 말렸다. 그들을 골목 끝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출입문을 닫아걸고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들어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독한 담배 연기가 바싹 마른 책 사이로 스며들었다. 낡은 책더미 사이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져 보였다.

“기억나? 오래전에 니 비행기 탔었는데.”


-다음주에 4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70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한민국 수출이 AI 열풍을 타고 7000억 달러 벽을 넘으며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이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일평균 수출도 26.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대외 악재를 뚫고 이뤄낸 성과다.무역수지는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연간 780..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비빔국수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꽃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