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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의 시와 사회]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 지창영 시인
  • 등록 2024-12-17 19:03:51
  • 수정 2024-12-23 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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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강의 「서울의 겨울 12」에 나타난 산 자와 죽은 자의 사랑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상황과 조건이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난 역사에서 배운 것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엄습한 비상계엄이라는 상황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가 후진하고 있다고는 느꼈지만 지나쳐 온 지 40년을 훌쩍 넘긴 계엄역까지 회귀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 황당한 현실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타개하지 못했다면 서울은 지금쯤 혹독한 겨울 공포에 갇혀 숨을 간신히 몰아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과거의 경험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은 무장하고 진입하는 군인들을 맨몸으로 막아섰고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동원된 군인들에게서도 무지막지한 돌격의 자세보다는 뒷걸음으로 물러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엄을 주도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며 유난히 젊은 불빛들이 여의도의 밤을 환히 밝혔고, 응원하는 사람들은 식음료 선결제로 훈훈한 나눔을 실천했다.

 

이런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기까지 한국 사회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부여안고 어루만져 왔다. 살아남은 자로서 부채의식에 시달리며 죽은 자와 함께 트라우마를 달래야 했다. 이렇게 안으로 쌓여 온 의식은 결정적 순간에 빛을 발하며 역경을 순식간에 뒤집어 버렸다.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한강「서울의 겨울 12)

 

이 시는 2013년에 출간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되어 있다. 2013년은 작가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던 해다. 한강은 시와 소설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으로 끊임없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왔고, 이 점은 노벨문학상 수상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한강이 노벨상을 받은 바로 그 해에 난데없는 비상계엄이 발표되었다. 그녀는 "2024년에 다시 계엄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를 막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우리 모두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 간절함으로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서울의 겨울 12」에서 특히 주목되는 단어들은 '겨울' '살얼음' '물빛' '강물 소리'다. 겨울은 시대적 배경이요, 뺨 위의 살얼음은 인간의 상황으로 읽힌다. 엄혹한 시대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정황 속에 너와 내가 있다. 어쩌면 죽은 자로서의 너와 살아남은 자로서의 나다. 네가 올 때 비로소 얼음은 녹아 물이 흐르고 마침내 강물 소리로 넘친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둘 때 이 시는 몇 번을 음미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24년 겨울, 한강이 말하던 소년이 왔다. 우리는 그 소년의 '호흡이 되어' 주었고 '벅찬 숨결이 되어' 주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드는 사랑. 올해 서울의 겨울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달궈진 뜨거운 사랑의 거리가 되었다.

 

그 사랑은 촛불집회에서 울려 퍼지는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로 변주되고 있다.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한강이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만나 새 역사를 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사랑으로 새 세계를 열어젖힌다.

 

사랑을 체험한 우리 공동체는 또 다른 어느 날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가고 있다. 역사가 새로 열리는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얼어붙었던 한은 모두 풀리고 강물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지창영 시인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 『송전탑』이 있고 번역서로 『명상으로 얻는 깨달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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