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영 시인
전야(前夜)는 특정한 일이나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시기나 단계를 뜻한다. 전야는 보통 변화를 앞두고 있으므로 설렘을 동반하기도 하고 다부진 각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선거만큼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흔치 않다. 선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사회에 일정 부분 변화가 일기도 한다. 그러나 그간 있었던 선거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던가' 하고 되짚어 보면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사회는 들썩였지만 지나고 보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자정 가까운 4·11 총선 전야,
비가 몰아치는 을지로입구역 지하도
노숙자 하나가 라면박스로 지은 집에 들어가
성자처럼 잠을 청하고 있다
눈가에 오래 맺힌 이슬이 몇 반짝!
(이시영, 「전야」)
2014년에 발행된 시집 『호야네 말』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총선 직전 밤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낮에는 막바지 선거운동으로 들썩였을 것이다. 자정을 앞두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설칠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전혀 다른 곳에 시선을 둔다. 지하도의 노숙자다. '비가 몰아치는' 날씨에 그는 '라면박스로 지은 집'에서 세상 일에 초연한 듯 잠을 청한다. 그 모습을 시인은 '성자처럼'이라고 표현했다. 시인의 눈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눈가에 오래 맺힌 이슬'에 초점을 맞춘다.
대다수 서민들에게 선거란 무엇인가. 화려한 공약에 한껏 기대했다가 결국 실망으로 주저앉은 경험이 얼마나 많았던가. 촛불항쟁으로 적폐 정권을 몰아내고 새 대통령을 세웠을 때의 기대감도 잠시, 이어서 등장한 검찰 정권의 횡포에 국민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 세력이 일으킨 내란을 막아 내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별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대선 후보를 바꾸려다 실패했다. 서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들끼리의 권력 싸움에 눈이 멀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이 자기들만의 리그에 전념하는 동안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던 서민은 일면 지하도의 노숙자처럼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선거가 자기들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 시인은 선거가 임박한 시점을 설정하고 노숙자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약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참는 것밖에 없으니 '성자'로 표현될 법하다. 그러나 스스로 참는 길을 택한 성자와 달리 시적 주인공은 강요된 인내에 시달린 존재다. 오래 절망해 온 사정이 '눈가에 오래 맺힌 이슬'로 표현되었다.
최근에는 사뭇 다른 기류가 보인다. 선거로 바꾸고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며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다수의 민중들이 참여의 폭을 넓히고 있다. 어느 때보다 많은 민중이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주인으로 나서고 있다.
내란을 막는 데도 민중이 큰 역할을 했고, 사법부의 선거 개입을 막아 내는 데도 민중이 주역으로 나섰다. 특히, 그동안 사회에 무관심하다고 평가되던 젊은 세대가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자신을 드러내기 꺼리던 약자와 소수자가 깃발을 들고 행진에 참여한다. 이제는 정권 교체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대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며 광범위한 개혁 과제들을 수렴하고 있다.
그동안 고통받던 서민 대중이 정치권에만 맡겨 두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나서서 변화를 추동하는 한 세상은 분명히 바뀔 것이다.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나갈 때 총선이든 대선이든 그 의미는 깊어질 것이다.
노숙자가 '총선 전야'에 '비가 몰아치는'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는 것처럼, 소외받던 사람들이 선거에 냉담하던 시절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눈가에 오래 맺힌 이슬'이 걷히고 아침해를 맞아 빛나는 눈동자가 부각되는 날을 고대한다.
지창영 시인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 『송전탑』이 있고 번역서로 『명상으로 얻는 깨달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