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쓸쓸한 저녁을 지나가는 것이고
너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검불 같은 미움들
화려한 영광과 찬란한 고독들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지나가는 것이다
햇빛이 눈부신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이마에 손을 얹고 어린 시절 마을을 떠나
뒷짐을 지고 길을 걸어가는
허리 굽은 노인들을 알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은 날도 지나가는 날이라는 것을
여름 물가에 앉은 소금쟁이처럼
골목에 서 있던 눈사람처럼
오후 다섯 시의 담벼락을 지나 뭉게구름을 지나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엉겅퀴 뿌리 같은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다
지나간 천둥소리였고
지나간 빗소리였다
너는 나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어느 사막의 신기루처럼
-권대웅 시인의 시 '지나간다' 전문
2025년 <녹색평론> 겨울호에 실린 시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관계, 사랑, 시간까지도 머무는 것은 없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도, 학창 시절도, 영원할 것 같던 청춘도 모두 지나갔다. "여름 물가에 앉은 소금쟁이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골목에 서 있던 눈사람처럼" 계절이 바뀌면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조차 "지나가는 날"이 될 것이다.
결국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도, 왔다 떠나가는 탄생과 죽음도, 잠시 존재를 통과해가는 현상이라 하겠다. 결국 "너와 나"는 주체가 아니라 지나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는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라는 스토아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와 닮아있다. <현대인을 위한 스토아 철학의 실천>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실천들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고, 오히려 내면의 덕을 쌓게 되어 세상과 더 깊고 건강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했다.
올해는 모두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덜 집착하고, 덜 슬퍼하고, 덜 미워하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세상을 참 따스한 시선으로 보게 하는 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