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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작약과 공터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4-20 01:13:36
  • 수정 2025-04-20 08: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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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 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버리는 고요때문에 


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허연 시인의 시 '작약과 공터' 전문



 이 시는 2025년 제 3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약"은 모란과 함께 오뉴월을 대표하는 꽃이다. 우리에게도 친근한 식물이고 뿌리는 건강에도 아주 유익한 약재로 사용된다. 특히 생리통에 효과가 있어 여자와 관계 깊다고 할 수 있다.  


향기가 거의 없는 모란이 '앉은 꽃'이라면 향기가 진한 "작약"은 '움직이는 꽃'이다. 봄의 끝자락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에 피어 지저귀던 "참새"가 죽은 "사체"가 있는 생존의 "갈비집" 뒤편 "공터"에서 "목 매 자살한 여자"처럼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로 무언가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공터"가 고정관념 등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면 "작약"은 자크 라캉과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론가들이 주장한 '잉여향유'처럼 "공터"를 향하여 파동치는 어떤 '새로운 변화'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욕망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울먹거림"으로 보여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잔인 속의 고요"인 묵언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화자인 "나"는 알아듣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책임"감을 갖고 지켜본다.


그것 또한 "공터" 밖으로 나가면 평범한 또 하나의 죽은 관념이 되기 때문에 "여기" 이 순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귀 기울이는 "나"는 "작약"과 동일시되어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 되어간다.


꽃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존재 이유'를 감각하게 하는 깊고 높은 시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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