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문정희 시인의 시 '도착' 전문
이 시는 문정희 시인의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에 실려있다.
가끔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어느날 돌아보면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 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기대했던 것 만큼 일이 잘 안 풀렸을 수도, 남들은 앞서 가는데 나만 뒤쳐졌다고 실망할 때도 있다.
그러다 달리 생각해보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이 있었고, 아무렇게나 매달리고 나뒹굴 수 있는 자유도 누렸다. 좀 벌레 먹으면 어떻고, 떫고 이지러지면 어떻는가. 이렇게 좋다고 생각하면 또 다 좋은 거 같기도 하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자." 라고 가르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 고 한다.
시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나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과거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도 필요할 것 같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