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지나간다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6-01-11 01:41:23
  • 수정 2026-01-11 10:37:21

기사수정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쓸쓸한 저녁을 지나가는 것이고

너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검불 같은 미움들

화려한 영광과 찬란한 고독들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지나가는 것이다

햇빛이 눈부신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이마에 손을 얹고 어린 시절 마을을 떠나

뒷짐을 지고 길을 걸어가는

허리 굽은 노인들을 알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은 날도 지나가는 날이라는 것을

여름 물가에 앉은 소금쟁이처럼

골목에 서 있던 눈사람처럼

오후 다섯 시의 담벼락을 지나 뭉게구름을 지나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엉겅퀴 뿌리 같은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다

지나간 천둥소리였고

지나간 빗소리였다

너는 나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어느 사막의 신기루처럼


-권대웅 시인의 시 '지나간다' 전문



2025년 <녹색평론> 겨울호에 실린 시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관계, 사랑, 시간까지도 머무는 것은 없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도, 학창 시절도, 영원할 것 같던 청춘도 모두 지나갔다. "여름 물가에 앉은 소금쟁이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골목에 서 있던 눈사람처럼" 계절이 바뀌면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조차 "지나가는 날"이 될 것이다.


결국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도, 왔다 떠나가는 탄생과 죽음도, 잠시 존재를 통과해가는 현상이라 하겠다. 결국 "너와 나"는 주체가 아니라 지나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는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라는 스토아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와 닮아있다. <현대인을 위한 스토아 철학의 실천>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실천들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고, 오히려 내면의 덕을 쌓게 되어 세상과 더 깊고 건강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했다. 


올해는 모두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덜 집착하고, 덜 슬퍼하고, 덜 미워하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세상을 참 따스한 시선으로 보게 하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70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한민국 수출이 AI 열풍을 타고 7000억 달러 벽을 넘으며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이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일평균 수출도 26.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대외 악재를 뚫고 이뤄낸 성과다.무역수지는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연간 780..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비빔국수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꽃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