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신경림 시인의 시 '찔레꽃은 피고' 전문
《사진관집 이층》 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시다.
화자는 소년이었을 때 학교 앞 점방집 딸을 좋아했나 보다. 수줍어서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볼 때 서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찔레꽃이 피어있었고 그 향기가 그애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결실을 맺기 전 전쟁이 났고 가게도 문 닫아 다시는 그애를 볼 수 없게 된다.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그애는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찔레꽃처럼 향기를 머금고 존재한다. 세월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모습으로 변해간다. 강나루 분교 선생님으로, 돌을 깨는 노동자로, 상인으로 내 곁에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함께 늙어간다.
아마도 그애는 화자가 좋아했는지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추억을 품고 한 평생 살아가는 화자는 외롭지 않았을 것 같다. 개인의 첫사랑이 '찔레꽃'을 매개로 확장되어 우리 서민들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한다. 가슴 저릿한 여운이 남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