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희망, 이것이 내 이름이다. 1970년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나는 대전 선화동에서 귀여운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남자아이가 둘이어서 부모님은 여자아기의 탄생을 무척 기뻐하셨다. 어렸을 때 내 모습은 선머슴아 같았다. 오빠들 틈에서 자라 남자애처럼 행동했던 것 같고, 눈썰미가 좋아서 한번 간 길이나 한번 본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을 잘해서 똑똑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으며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내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학교에 갔다 와선 늦게까지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과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마치 골목 대장이나 되는 듯 친구들을 몰고 다녔고, 동네 교회에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교회 목사님께 칭찬도 받았다. 또 교회에 행사가 있을 때면 나는 찬양과 무용을 도맡아 하면서 예술적인 끼를 키우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듯 나는 아주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어서 눈에 띄는 아이, 한마디로 왈가닥 소녀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부모님 모두 직장에 다니셔서 외할머니께서 집안 살림을 맡아 해 주셨다. 우리 할머니는 딸만 여섯이고 그중에서 우리 엄마는 넷째 딸인데 무용을 전공하셨고 교직에도 계셨는데 한마디로 그 당시 여자로는 엘리트셨다.
우리 할머니는 큰오빠에게 많은 정성을 쏟으셨다. 오빠가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면 기다리고 앉아 계시다가 라면을 정성스럽게 끓여 주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오빠를 깨워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내시곤 했다. 그 이유는 큰오빠는 항상 공부만 했고 늘 전교 1등을 도맡아 해서 우등상장을 받아와 할머니께 기쁨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이유는 할머니가 딸만 두셨기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한 한이 있어서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할머니가 오빠와 나를 차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투덜대기도 했고 심통도 많이 부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할머니께서 김장을 하려고 장을 봐서 언덕길을 내려오시다 미끄러져 넘어지셨다. 엄마가 병원에 가자고 하셨지만 괜찮다고 할머니는 병원에 가지 않았는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으시다 1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 소식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고 할머니 말을 잘 안 들었던 미안한 마음에 혼자서 많이 울었던 기억, 그것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죽음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무용으로 꾸는 꿈
나의 부모님들은 교육에 자율적이지만 원하면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는 분들이다.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 주셨고 미술학원도 보내 주셨다. 그러나 조금 다니면 흥미를 잃고 학원을 그만두었는데 무용학원을 보냈을 때는 꾸준히 잘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무용이 적성이 맞다고 생각하셔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무용을 시켜 주셨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신체조 반에 들어가 즐겁게 했다. 이런 나를 지켜보신 체육 선생님께서는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권해주셨고 나는 예고 무용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도 무용학과를 목표로 하루에 8시간 이상 무용 기초와 작품 연습, 그리고 입시 공부까지 열심히 했고 그 결과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난 나는, 대학 생활의 자유를 만끽하며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부푼 꿈으로 시작되었다. 1학년 초기엔 무용 연습과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정신 없었다. 신입생 환영회, 체육대회, 축제, 동아리 활동 등 여러 행사를 즐기며 어린 시절 꼬마 친구들과 골목을 휘젓고 다녔듯이 컴퍼스를 누비며 즐겁게 보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수업시간 외에는 춤을 추지 않은 몸은 알고 있는 듯 말을 걸었다. 입시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춤췄던 시간들이 떠올라 문뜩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무용을 얼마나 사랑하고 무용가로 얼마나 성공하고 싶은지, 내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고 모두 훌륭한 무용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무용가로 명성을 얻기까지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기에 연습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지인 언니의 소개로 직업 무용단의 최 단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오디션을 보고 방과 후 그곳에서 무용단원들과 함께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최 단장님의 춤은 상체의 부드러움과 하체의 파워풀한 테크닉을 겸비한 춤이 나는 무척 새롭고 좋았다. 나는 프로무용단 춤꾼들의 정열적인 연습을 따라가느라 한여름 무더위도 더운 줄 모르고 춤에 몰두하여 춤 맛을 느끼며 춤을 익혀 갔다. 최 단장님의 지도 방법은 기존의 틀을 깨는 시도였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정말 흥미롭고 진지했다. 계속되는 연습을 통해 나는 춤추는 이유가 명확해졌고, 춤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학생이라 정식 무용단원은 아니었지만 늘 같이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대학로 아르코 대극장에서 해마다 열리는 정기공연에 출연할 기회가 되었는데 학생인 나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고, 원 없이 춤을 추며 몸짓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김형희/Dancing10/2017년/116.8 x 91.0/Acrylic on Canvas
새로운 기회와 경험
공연을 마치고 무용단원 모두 한 달간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되었고 나도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새로운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하고 그곳에서 직접 춤을 배워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기회와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주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추었던 춤과는 달리 동작 하나하나에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움직임들은 나를 고민하게 했고, 새로운 경험들은 또 다른 춤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춤이 조금씩 성숙해가는 것을 느끼며 하나의 선의 움직임에도 책임감이 생겼다.
모델이라는 직업은 정말 매력적이다.
키 174cm, 몸무게 53kg, 무용으로 다져진 몸매라서 모델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현직 모델 언니 덕분에 나는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로 모델 활동을 했다. 무대 위 화려한 조명과 음악 속에서 양쪽의 갈려진 많은 관객 사이로 펼쳐진 런웨이를 디자이너들의 개성 있는 옷들을 입고 워킹하며 포즈를 취한다는 것, 정말 순간적인 짜릿한 즐거움이 있다. 아마 나는 무용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델이 되기를 희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호기심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다양한 기회와 경험은 나를 성장하게 했다, 내 삶을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보냈기 때문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 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했으며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후, 자신이 설립한 장애인예술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를 거쳐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