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시아의 호모룩스(Homo Lux) 이야기'...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 보기
  • 박정혜 교수
  • 등록 2024-12-02 00:00:01

기사수정

  



어김없이 마지막 달이 되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모래알 같기만 하다. 손안에 쥐는 것은 죄다 흩어져 내린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가뭇없다. 또 이렇게 한 해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18세기에 활약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이러하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 신성한 영혼에게는 안성맞춤의 옷" 

 

희로애락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을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고결하고 거룩한 신의 속성을 가진 '영혼'에게는 그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옷이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진실한 혼은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탄생의 순간에 주어지는 순수와 거리가 있다. 그런 순수는 갓 내린 눈밭과도 같다. 햇발이 내려앉아서 녹여지거나 누군가 지나가고 나면 순식간에 더러워진다. 태어나는 순간에 가졌던 순수는 변하기 마련이다. 무수한 인간관계와 마주한 상황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순수는 사라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깊은 곳으로 숨어든다. 

 

한번 숨어든 순수를 불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 과정이 지난해서 쉽게 포기하며 살기도 한다. 고난 극복을 위한 각고의 정성이 이뤄질 때, 그러한 순수는 깨어난다. 이 놀라운 부활은 영혼의 때를 벗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재탄생된 순수는 결코 빛바래지 않는다. 20세기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오는 순수는 결코 더럽히지 않는다"고 했다. 

 

태초의 순수로 머물 수 없는 삶이 슬픈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순수가 될 수 있는 삶이 아름답다. 인간에게 그런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매 순간 순수의 문이 열려있다. 20세기 미국의 시인 에드워드 에스틀린 커밍스는 "존재할 수 있거든, 단지 존재하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원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면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고 했다. 가능성의 문을 닫는 데 전력을 쏟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자명하다. 그것을 '순수의 전조'에서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궁극에는 어디에 가 있을지 알아차리는 것은 선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본증묘수(本證妙修)'다. 본래의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것 자체가 영묘한 수행의 과정이다. '나'를 우주의 에너지, 혹은 신과 하나로 인식하는 합일의식이 일어난다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럴 때 열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열정 안에서 한껏 뛰어놀 수 있다. 나를 온전히 이끌고 가는 신의 불꽃 같은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그런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한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이다. 라틴어로 인간(HOMO)'와 빛(LUX)의 결합어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에세이다. 

덧붙이는 글

박정혜 교수는 1급 정신보건전문요원, 1급 보육교사, 1급 독서심리상담사, 미술치료지도사, 문학치료사, 심상 시치료사다. 2006년 <시와 창작> 신인상, 2015년 <미래시학>신인상을 받았고 소설로는 2004년 <대한간호협회 문학상>, 2017년 <아코디언 북>에 당선됐다. 현재 심상 시치료 센터장으로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전주비전대 간호학과, 한일장신대 간호학과, 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겸임교수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지창영 시인의 시와 사회]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상황과 조건이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난 역사에서 배운 것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엄습한 비상계엄이라는 상황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가 후진하고 있다고는 느꼈지만 지나쳐 온 지 40년을 훌쩍 넘...
  2. [시아의 호모룩스(Homo Lux) 이야기] 감사의 힘 감사할 일이 없다. 석연찮은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나라가 시끄러우니 덩달아 삶도 번잡한 것 같기만 하다. 고요하고 정연한 연말은 당치도 않다. 초조와 긴박감이 따라다닌다. 그러는 동안 속절없이 또 하루가 간다.    그런데도 감사할 수 있을까? 목사이며 작가인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는 “감사하다는 것은 인생을 선물로 느끼는...
  3. [아이즈 인터뷰] 황정현 시인을 만나다.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황정현 시인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때맞춰 데뷔 4년 만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시집 제목은 시집 속에 수록된 시편 중 한 편의 제목인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파란)'이다. 사실 시인이 된 연유와 시에 대한 여러 견해를 듣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막 독자와 만날 출간한 시집을 소...
  4. [새책] "2025년은 암호화폐 투자의 원년" 《알트코인 하이퍼 사이클》알아야 한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과 반감기를 앞두고 암호화폐 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당선으로 2025년은 코인 투자자들에게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기회는 위험을 동반한다.거인의정원에서  알트코인 투자 전략을 집대성한 《알트코인 하이퍼 사이클》을 펴냈다. 2025년을 암호화폐 시장의 역사적인 ...
  5. [아이즈앨범] 바람, 풍경이 되다 바람, 풍경이 되다바람이 깃발을 마구 흔들자구호가 깃발 사이를 헤집고 나왔다'탄핵'의 함성이 빌딩 사이를 휘달리기 시작했다우리는 바람을 담았다촛불로, 응원봉으로어둠을 몰아낸다우리 사이의 빛이별처럼 빛날 때광장은 캔버스가 된다풍경이 된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