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에 한 마을에서 시작된 불이 매서운 서풍을 타고 이곳저곳 옮겨붙었다. 작은 산들이 타고 더 큰 산들이 탔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은 불길은 산맥으로 번졌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불길 때문에 결국 평화롭던 여러 마을이 타버렸다. 그 사이 기력이 쇠한 노인들이 그러니까 어쩌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속았수다'의 주인공 '오애순'과 '양관식'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어르신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화마 속에서 참변을 당했다. 산짐승, 들짐승, 축사에 갇힌 소, 돼지들도 자기들이 저지른 죄도 아닌데 비명횡사했다. 정부는 대책이랍시고 달랑 문자 몇 자 보냈다. 그에 따라 알아서 어디로든 도망을 가야 했을까? 그나마 몸이 성한 사람들은 그럴 수 있었겠다. 그러나 혼자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이들이 변을 당했다. 꼼짝없이 제자리에서 구조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들이 변을 당했다. 이놈의 세상은 어찌 된 일인지 누구 하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들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권력자 한 명이 없다. "힘없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가 잘해야 했는데,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 좀 더 세심하게 살펴야 했는데, 스스로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챙겨야 했는데, 미리 대피시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비는 권력자 한 명이 없다. 그러니까 막말로 눈을 씻고 봐도 용서를 청하는 놈 하나 없다. 그 와중에 무슨 무슨 권한 대행이라는 자는,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으며 쌍 V를 그려 대고 기념사진이나 박고 있었다. 무슨 이따위 정권이 있나? 어떻게 이따위 세상이 있나? 자기가 불 지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되는 일인가? 자기 가족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괜찮은 일인가?
돌이켜 보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대피할 힘이 없는 이들이 수시로 당하는 일이다. 불이나 도망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가슴만 팡팡 치다가, 숨이 막혀 희생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2012년 중증장애인 김주영 씨가 집에 불이 났는데, 혼자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활동지원사가 퇴근한 뒤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부족한 활동지원 시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혼자 남은 시간에 안전에 대한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여러 시설에 대한 대책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재난약자 행동요령' 매뉴얼이었다. 실용성이 없는 알량하기 그지없는 대책이었다. 당연히 그 이후로도 매해 도망칠 수 없는 이들이 불구덩이에 혼자 남겨진 채 목숨을 잃었다. 2022년에는 서울 은평구에서 시각장애인이, 또 어느 곳에서는 전동휠체어가 들어가지 못하는 집 구조 때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해 서울 관악구에 폭우가 집안을 덮쳐 도망치지 못한 발달장애인 가족이 변을 당했다. 매해 전국 곳곳에서 이런 희생들이 대책 없이 늘어간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내가 사는 마을 곁 미추홀구에서 하지절단 장애를 가진 노인이 불이 난 집을 빠져나오지 못해 희생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우리가 사는 집이나 마을에 불이 나면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집이 감옥이고 마을이 곧 지옥이다. 매번 대책을 세워달라고 안타까운 참변을 막아달라고 요청하지만, 나오는 대책은 언제나 알량한 '안전가이드'이다. 언제는 '안전가이드'가 없어서 도망칠 수 없었나? 그 '안전가이드'가 번지는 불길을 막아주나? 질식할 연기를 막아주나? 저절로 도망치도록 길을 내어주나?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일까? 마음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약자들을 지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억울한 죽음들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 당사자들이 스스로 대책을 세우고 정책을 만들어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진이나 찍는 권력자에게 제출해야 하나?
워낙 피해가 컸다. 그래서일까? 산불에 대해 많은 말이 떠돈다. 화재의 원인으로 정치적 음모론을 들고나오는 사람도 있고, 불에 잘 타는 소나무가 원인이어서 소나무만 주야장천 심어대는 산림청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누구는 산불을 초반에 감당할 수 있는 소방헬기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산불이 이처럼 거대하게 확산하여 크나큰 재앙이 된 이유가 '기후 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에 크고 작은 산불이 잦았다. 다만 이번 화재가 예전 화제와 다른 점은 봄철에 만나기 힘든 강한 서풍이 불었다는 것과 예년 3월에는 보기 드문 25~26도의 높은 기온이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건조한 날씨와 서풍이 불길이 커진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문가들이 기후변화가 화재 확산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분석한 데이터를 보면 설득력이 매우 높아 보인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 산불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불처럼 기후재난이 심각하다. 기후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홍수 또는 대형 산불 같은 재난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어떤 재난이든 누구나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약자들에 대한 대책은 미흡하다. 아니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신체적 약자들에게 더 가혹한 것이 재해이다. 아무 죄 없이 무서운 형벌을 받거나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 재난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약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연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려 하고,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남을 도울 줄 아는 마음들이 인류를 숱한 멸종 위기에서 지켜 주었다고 한다. 이번 화재에도 곳곳의 많은 사람이 이웃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아낌없이 박수 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그 숭고하고 귀한 마음들이 정책이 되고 제도가 되게 하는 일이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개인들의 마음도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의지로 선한 영향력이 세워져야 한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게 국가가 머리 숙여 사죄하고 가슴 아파해야 한다. 안전한 마을은 재난이 없는 마을이다. 그러나 천재지변은 있으므로 재난이 와도 가장 약한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마을이 필요하다. 서로 더 연민하는 마을과 마을이 늘어날 때 인류는 다시금 태어날 것이다. 그런 마을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지금 당장 찬란한 마을을 꾸려야 한다.
마을기획 청년활동가 송형선은 사단법인]마중물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남동희망공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