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1-19 08:53:35
  • 수정 2025-02-02 00:08:52

기사수정



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안수현 시인의 시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전문 

 

이 시는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이다.


심사평 중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지만 끝끝내 살아내는 질긴 생명의 온기가 마음을 움직였다"는 부분에 공감이 많이 갔다. '양자물리학' 이론에선 우주 만물은 에너지의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같은 주파수끼리 서로 공명한다고 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과 '마음'도 파동이면서 입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 입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기운이 작용하여 무언가 변화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엄마는 윗집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떨어지는 물이 신경쓰이지만 "많이 더운가보다" 하며 토마토 화분을 적시는 생명의 물로 이용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변화시켜 판단의 보편성을 뒤짚는다. 이런 엄마를 보고 자란 화자도 외롭지만 그 오래된 기억과 관계를 간직한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는 토마토처럼 어디에서든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가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위 시가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토마토'를 매개체로 썼지만 행간과 행간을 넘을 때마다 엄마와 딸로 이어지는 마음의 파동이 크다. 

 

토마토 한 그루를 심듯 새해에는 시처럼 주변에...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3. 2025년 포엠피플 신인문학상 주인공 22세 이고은 "시 없인 삶 설명 못 해" 올해 《포엠피플》신인문학상은 22세 이고은 씨가 차지했다. 16일 인천시인협회 주관하고 인천 경운동 산업단지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351편의 경쟁작을 뚫고 받은 것이다. 행사 1부는 《포엠피플》 8호 발간(겨울호)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2022년 2월, 문단의 폐쇄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회원들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기치 아래 창간된 계..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같은 부대 동기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텐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진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
  5.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새우탕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 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 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 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