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주도하는 퍼스널 헬스케어 기술은 분명 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질병을 조기에 예측하고, 개인 맞춤형 치료법을 제시하며,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크다. 다양한 퍼스널 헬스 케어 보고서에서도 이와 같은 기술 혁신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기대만큼, 냉정한 우려 또한 함께 다루어야 한다.
기술 발전이 곧 의료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선, AI 의료기술에 대한 과신이 문제다. AI 진단 시스템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의료진의 진단을 보조하지만, 오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편향된 학습 데이터, 예상치 못한 알고리즘 오류는 환자에게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의료 AI는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블랙박스 특성을 지녀,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 누가 결과에 책임을 질 것인가? 개발자, 의료기관, 아니면 AI 시스템 그 자체인가? 현행 법과 제도는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의료 데이터의 상업화와 개인정보 유출 위험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퍼스널 헬스케어는 생체정보, 생활습관, 유전정보 등 고도로 민감한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 데이터가 환자의 동의 없이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되거나 제3자에게 판매될 경우,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와 사회적 불신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보험사, 제약회사, 고용주 등이 건강 데이터를 차별적 목적으로 활용한다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건강 불평등’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셋째, 기술 혜택의 편중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AI 의료 시스템과 첨단 헬스케어 서비스는 주로 대도시,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 디지털 인프라가 부족한 농어촌 지역이나 고령층은 여전히 혜택에서 소외될 위험이 크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의료 접근성 격차가 심화되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전통적 의료 윤리의 해체 가능성이다. 의료는 환자와 의료진 간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러나 AI 진료 보조 시스템이 일상화되면 환자는 인간 의사와 상호작용하는 대신, 알고리즘에 의해 판단되고 분류되는 존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인간적 배려와 공감, 직관이라는 의료의 핵심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단순한 기술 낙관론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의료는 인간 생명과 직결된 영역이다. 기술의 편리함에 앞서, 규범과 신뢰, 그리고 인간 중심적 가치가 의료 시스템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만들어가고 있는 제도적 대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미국은 인공지능 기반 의료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철저한 관리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은 AI 의료기기를 '의료기기용 소프트웨어(SaMD: Software as a Medical Device)'로 별도 분류하고, 일반 의료기기와 다른 평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특히 '사전 변경관리계획(Predetermined Change Control Plan)'을 허용하여, 인공지능이 자율적으로 업데이트되더라도 사전 승인된 범위 내에서만 기능을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기술 혁신을 유연하게 지원하는 동시에,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접근법이다.
한편, 개인정보 보호 측면에서는 HIPAA(건강보험 이동성과 책임법)을 통해 의료 데이터 보호를 관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AI 기술 발전에 맞춰 별도의 가이드 라인을 추가적으로 마련하고 있어,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에 부합하는 법제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또한, 'All of Us'라는 국가 주도형 헬스 빅데이터 프로젝트를 통해 100만 명의 유전체 및 건강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고 있으며, 민관 협력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더욱 강력하고 체계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 EU는 '의료기기 규정(MDR: Medical Device Regulation)'을 통해 AI를 포함한 소프트웨어형 의료기기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특히 의료용 AI가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성능이 변동될 경우, 반드시 재인증 절차를 거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환자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EU 특유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데이터 보호에 있어서도 EU는 단연 세계적 모범을 보이고 있다.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을 통해 개인 데이터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AI 의사결정에 대해 '설명받을 권리(Right to Explanation)'를 명문화했다. 이는 단순한 프라이버시 보호를 넘어, AI의 판단 과정 자체에 대해 개인이 이해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한 매우 진일보한 조치다.
또한, EU는 ‘유럽 건강 데이터 공간(EHDS: European Health Data Space)’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이는 건강 데이터를 국경을 넘어 안전하게 공유하고, 연구 및 공익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규모 공공 인프라 사업이다. AI 시대에 공공성과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는 셈이다.
미국과 EU 모두 디지털 헬스케어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도 단순한 기술 도입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규제, 데이터 보호, 공공 인프라, 디지털 포용성,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중심적 의료윤리'를 함께 고민하고 제도화해 왔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AI 의료기기 규제는 기존 의료기기법 체계 내에 부분적으로 흡수된 상태이며, 별도의 SaMD 관리 체계는 미비하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존재하지만, 헬스케어 특화 데이터 활용과 보호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한, 통합적인 의료 데이터 인프라가 부재하여, 민간 병원·기업별 데이터 파편화 문제가 심각하다. 고령층과 정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포용 정책 역시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미래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해 다음과 같은 과감한 정책적 노력을 제안한다.
첫째, AI 의료기술에 대한 엄격한 임상평가와 지속적 모니터링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단순히 ‘기능성’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전성’과 ‘책임성’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인허가 기준은 명확해야 하며, 상용화 이후에도 성능과 부작용에 대한 철저한 사후 감시가 필요하다.
둘째, 국가 주도의 공공 의료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의료 데이터 생태계는 영리 추구와 공공성 사이의 균형을 잃기 쉽다. 데이터 수집, 관리, 활용 전 과정에 걸쳐 투명성과 공익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 강화가 필요하다. 농어촌 지역, 고령층, 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헬스케어 서비스와 디지털 건강 리터러시(literacy) 교육[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스스로 정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종합적 교육. 즉, AI, 빅데이터, 모바일 헬스기기, 원격진료 등 새로운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위험을 인지하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넷째, AI 시대 의료윤리 재정립이 요구된다. 환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윤리 원칙을 확립하고, AI가 인간 의료진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명확한 가이드 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AI와 빅데이터는 의료의 미래를 여는 열쇠다. 그러나 이 열쇠는 두 가지 문을 열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평등하고 정밀한 의료 혁신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불평등과 불신이 팽배한 의료 양극화의 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문을 열 것인가. 그 답은 기술이 아닌, 지금 우리가 세우는 규범과 신뢰, 제도적 선택에 달려 있다.
의료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미래 의료 시스템 역시 ‘사람을 중심에 둔’ 혁신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