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전 대학교 4학년, 2학기를 남겨 두고 교통사고가 났다. 엄마는 다시 일어나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휴학 신청을 하셨다. 하지만, 내 병은 생각처럼 빨리 나아지지 않았고 휴학을 4번이나 연장해 더 이상 휴학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당시 무용과를 졸업하려면 졸업 작품을 준비해 공연을 올려야 하는데 내 몸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나는 졸업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엄마는 언젠가는 대학 졸업장이 쓰일 날이 있을지 모르니 학과장 교수님을 만나 졸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학교에 가셔서 지도 교수님과 상담 후, 학점은 어느 정도 이수해 놓았으니 소논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대체해 주시겠다는 방안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1년 후 졸업했지만, 졸업식장에는 가지 못했고 친구가 졸업장과 앨범, 그리고 학사모와 가운을 가져다주어 가족들과 친구, 지인들을 모시고 집에서 조촐하게 졸업식을 했다.
그때를 생각해 보니 나는 나에게 처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언젠가 다시 일어나 춤을 출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소망으로 살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엄마는 무의식속에서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딸의 미래를 위해 현명하게 처리해 주셨지만, 그때 엄마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그 눈물은 현재의 나를 있게 한 희망의 눈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에 도전!
그 덕분에 나는 대학원에 지원하였고 대학원 최종 합격자 15명 가운데 내 이름이 있었다. 2010년 CHA의과학대학교 대체의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식에 참석했는데 장애 학생은 나 혼자였다. 대학원 수업과 1000시간의 임상 실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 수업이 주말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서 일하는 남편에게만 매달릴 수 없어 통학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동휠체어, 지하철, 장애인 콜택시, 활동보조인 등 장애인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많이 개선되고 있었고 쉽지 않았지만, 스스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나이 먹어서 대학원 공부를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대학 전공과는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사회복지대학원이 아닌 의과학대학원이어서 임상 미술치료를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공부는 어려웠지만, 하나하나 알아 간다는 기쁨이 컸고, 무엇보다 빨리 졸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학업에 매진했다. 나는 처음부터 나처럼 중도에 척수손상를 갖게 되는 환자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싶었고, 2학기부터는 국립재활병원에서 척수손상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실습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 당시 세계적으로도 임상미술치료 분야에 척수손상 환자의 논문 자료가 전무해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논문 주제는 “임상미술치료가 척수손상 환자의 우울감 감소와 재활 동기 향상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논문은 척수손상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세계 최초 임상미술치료 분야 졸업논문이 되었고, 1000시간이 넘는 임상 실습과 졸업시험을 통과, 총 평균 점수 4.32의 우수한 성적으로 2년 만에 조기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 후 재활병원, 장애인복지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경로대학, 방과 후 학교 등 임상미술치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임상미술치료사로 열심히 일했다. 다양한 계층의 임상 사례들을 접하면서 남녀노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문제들로 힘들어하며 절망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보다는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장애 그것도 전신 마비만 아니면 세상에 절망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나보다 더 절망하고 나보다 더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상처가 제일 아프고 힘든거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임상미술치료라는 학문을 통해 지치고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하고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임상미술치료는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활용, 대상자들의 질병과 현재 상태 등을 진단하여 전문적이고 맞춤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상자들이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의료적 치료가 아닌 대체의학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자살, 성폭력, 엽기적 살인, 아동학대, 청소년 가출, 보복 운전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배려와 이해가 없어 나타나는 사회문제들이 많아졌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내면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비언어적인 미술치료는 그리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져 위로하며, 피드백을 통해 무의식 속의 측은한 자아를 발견, 힘든 나를 토해 낼 수 있도록 한다. 세상에는 장애가 있든 없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모두 상처를 주고받고, 치유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매년 육체적인 건강관리를 위해 정기검진을 받듯이, 이제는 정신적인 건강관리를 위해 대체의학적 예술 치료로 정신건강 관리도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애인이 되어 임상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병원 미술치료실에 들어가면 환자나 보호자들은 나를 미술치료받으러 온 환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나를 소개하면 모두 놀라는 표정을 볼 수 있다.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장애를 이야기 나누면서 환자들은 비장애 미술치료사들보다 더 빨리 나에게 마음을 연다. 그리고 나에게서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기도 한다. 늘 누군가의 도움만 받으며 살아야 하는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 줄 수 있고, 그들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심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며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형희 /오색빛깔 선의 움직임 / 2016년/ 116.8 x 80.3(변형) / 작품재료: 종이, 먹, 채색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다.
2007년 비영리민간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했다. 장애인, 비장애인, 모든 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나, 너,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단체다.
처음 <표현미술아카데미>와 <장애여성화가만들기:그녀들의 색깔이야기> 미술교육 프로젝트로 시작했다. 예술의 특성상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여 5년 동안 진행했고, 많은 장애인, 비장애인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 또 <야외미술치료체험:그림속의 내 마음 찾기> <힐링캠프:지리산에서 예술의 향기를 찾다>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예술을 이해하며 자신의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014, 2015년<토탈아트창작움직이는그림콘서트:그림속,그녀들의이야기> 프로젝트는 모든 예술 장르의 해체와 재결합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로 만든 실험 무대 공연이다. 장애 여성 화가들의 삶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잔잔하게 풀어내어 많은 관객에게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2016년<토탈아트창작실험극:춤추는그림,말하는시,사랑실은노래>프로젝트는 장애예술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다양한 예술 장르의 결합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실험 창작극을 제작했다.
그 후 2017년에는 실험 창작극 제작을 경험으로 장애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창작뮤지컬 ‘비상’:춤추는그림,말하는시,행복찿는음악>을 본격적으로 제작하여 전석 매진을 기록하였고, 2018년 재연 공연도 매진 기록과 함께 성공을 이뤄냈다.
그동안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는 18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의 흐름속에서 묵묵히 장애인이 장애예술인이 되도록 체계적인 교육에 힘썼고, 성장한 장애예술인들이 창작하고 발표할 수 있도록 공연과 전시회를 열어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고, 장애로 인한 결핍이 예술의 오브제가 되어 ‘장애예술’ 이라는 새로운 예술언어로 브랜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 예술가들은 자유롭다. 우리 단체는 장애인, 비장애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새롭고, 재밌고, 감동적인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모이고, 예술놀이가 끝나면 해체한다.
‘사람과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 세상과의 소통, 나와의 화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되도록 예술은 연결고리가 된다. 앞으로 우리 단체는 새롭고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단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획서 쓰는 일부터 사업비 정산하는 일까지 내 손으로 하고 있어 힘들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꿈, 사랑, 도전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내 가슴속에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는 것이며,
도전한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이다.”
나는 강연을 나가면 이런 메시지를 남긴다. 내 인생에 있어 ‘꿈, 사랑, 도전’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시작한 그림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고, 그 꿈이 자라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 남편과 아이를 얻었다. 그리고 도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배울수 있는 기회가 되어 화가이자 임상미술치료사가 되었다. 장애는 나에게 독특하고 특별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브제’가 되었고, 예술을 통해 나는 내면과 화해했고, 사회와 소통했고,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의인이 어린시절에 여름성경학교에 다녀와서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엄마! 오늘 특별기도 시간에 엄마 걸어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엄마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과 만나게 해준다.
문뜩 시간을 되돌아보니, 비장애인으로 살았던 23년,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33년째, 나는 참 부지런히 움직이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이제는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익숙할 텐데 그래도 가끔은 무대 위에서 돌고, 뛰고, 날아오르는 움직임의 몸짓, 자유를 꿈꾼다. 꿈을 꾸고, 사랑하고, 도전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김형희 /집으로 가는 길 / 2021년 / 162.2 x 112.1 / Acrylic on Canvas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졸업하고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애예술 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고 대표를 역임,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