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세계경제연구원 제공]
우리는 지금 세계의 방향이 급격히 바뀌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냉전 이후 확산되던 자유무역과 글로벌 협력의 질서는 흔들리고, 지정학은 다시 경제를 압도하며, 정치의 선택은 곧바로 시장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성장과 안정이 동시에 위협받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은 더 이상 관성에 의존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한국은 어떤 국가로 남을 것인가? 고속 성장의 기억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성숙한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위해 불편한 선택을 감내할 것인가.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초대 금융위원회 위원장(2008-2009)으로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의 성공적 조기 극복에 핵심 역할을 했고 같은 기간 한국인 최초로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 아태지역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최장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2009-2013)으로 국내외 투자 다변화와 기금운용 패러다임 선진화를 통해 국민연금의 국민적 신뢰와 국제 경쟁력을 제고했다. 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에 이어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1980년대 초 미시간주립대 교수, 이후 15년간 세계은행(WB) 금융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 등을 거쳐 1998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귀국해 경제부총리 특보와 국제금융센터 원장으로 IMF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우리금융 부회장(2001-2004), 딜로이트(Deloitte)코리아 회장, 포스코(POSCO) 이사회 의장, 외교통상부 국제금융대사(2007-2008)를 역임했다.
《Beyond the Crisis》(2010) 등 다수의 국영문 저서와 논문이 있고, <파이낸셜타임즈>, <월스트리트저널>, <이코노미스트> 등 국내외 주요 언론사에 칼럼을 썼고, 다보스(Davos)포럼 등 국내외 주요 국제컨퍼런스 초청 강연을 했다.
'아시아지역 올해의 CEO상'(2011), 청조근정훈장(2012), '인디애나대를 빛낸 국제동문상'(2013) 세계 최초 수상, 서울상대 총동창회 '자랑스러운 동문상'(2023), 서울대 경제학과, 인디애나대 경제학/경영학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Executive Program)과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최고경영자과정(AMP)을 수료했다.
전광우 이사장이 분석한 세계 경제의 흐름과 우리 경제가 앞서가기 위한 방안을 들어봤다.
세계경제와 금융의 국내외 현장에서 오랫동안 한국을 바라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한국은 여전히 역동적이지만 동시에 취약하다. 기술력과 인적 자산은 뛰어나지만, 정치와 제도의 신뢰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괴리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코리아디스카운트'의 본질이다.
미·중 패권 경쟁, 트럼프 이후의 세계, 저성장과 인구위기, 연금·재정·노동개혁, 인공지능과 산업 대전환 등은 각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적 도전이다. 그 도전 앞에서 회피하거나 미루는 선택의 비용은 결국 다음 세대로 전가된다.
대한민국은 수차례 위기 속에서도 방향을 바로잡아 왔다. 관건은 위기를 인식하는 용기와, 단기적 처방보다 장기적 책임을 택하는 리더십이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경제·산업·금융환경 속에서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지켜내고 키워갈 것인가라는 시대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동북아 지정학적 도전 극복, 그리고 AI·디지털혁명시대에 다음 세대를 위한 강국 건설의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
‘2023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기조 강연자로 나선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노벨경제학상 수상)와 대담하는 전광우 이사장. [세계경제연구원 제공]
격변의 세계질서에서 한국의 좌표는?
세계는 다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글로벌화의 속도가 늦춰지고 지정학은 경제와 무역을 규정하며 가치와 체제를 둘러싼 경쟁은 노골화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과 신냉전 구도, 트럼프 전후의 미국, 그리고 동북아 긴장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이 어떤 좌표에 놓여 있는가.
세계질서의 변화는 선택지를 줄이고 선택의 책임을 무겁게 만든다. 전략적 모호성의 공간이 사라지는 시대,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길은 무엇인가?
저성장의 경고음…한국 경제는 어디에서 멈췄는가?
한국 경제는 충분히 성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성장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잠재성장률 하락, 생산성 정체, 인구구조 악화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정점론'과 '일본화'라는 불편한 논의가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경제가 어디에서 속도를 잃었는지, 무엇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진단해야 한다.
과거의 성공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찾아야 한다.
코리아디스카운트의 본질…시장이 묻는 정치와 제도는 무엇인가?
감정은 시장을 흔들지만, 신뢰는 시장을 움직인다. 기업의 실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 주식시장의 저평가 현상, 반복되는 외국 자본의 이탈과 회귀는 구조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제는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둘러싼 정치와 제도에 대한 신뢰다. 코리아디스카운트를 둘러싼 통상적 설명을 넘어 정치 거버넌스와 제도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자본시장이 던지는 질문에 한국 사회는 과연 제대로 답하고 있는지, 그 근본을 물어야 한다.
개혁 없는 미래는 없다…연금·노동·재정의 선택은?
모든 사회는 언젠가 선택의 순간과 마주한다. 지금의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미래를 위해 불편한 결단을 내릴 것인가.
연금·재정·노동 개혁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 책임의 문제다. 구조개혁을 미뤄온 대가가 무엇인지, 왜 지금이 마지막 기회에 가까운지를 설명해야 한다. 개혁은 고통스럽지만 회피 비용은 더 크다. 그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강(自强)의 조건…기술·AI·국가경쟁력을 어떻게 재설계해야 하나?
국가의 생존력은 결국 스스로 얼마나 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기술 패권 경쟁, AI혁명, 반도체와 안보의 연결은 국가전략의 핵심이 됐다. 외부 환경을 탓하기 전에 내부의 체력부터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이 의존이 아닌 자강을 선택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기술과 산업, 인적 자본, 그리고 국가전략의 재설계 없이는 미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한국을 믿는다
나는 한 번도 한국의 가능성을 의심한 적이 없다. 오랜 시간 해외에서 일하며 국제기구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직접 접했다.
밖에서 본 한국은 언제나 특별했다. 빠른 학습 능력, 높은 교육 수준, 그리고 위기 때마다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 사회. 많은 나라가 부러워하는 그 자산이 당연시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왔다.
워싱턴DC 소재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던 시절 여러 국가의 흥망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실패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가난이 아니라 책임 회피였다.
문제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기 없는 결정을 다음 세대로 미루는 순간 국가의 체력은 서서히 고갈된다. 반대로 성공한 국가들은 언제나 불편한 선택을 감수했다. 자유와 책임, 성장과 규율 사이의 균형을 지켜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구조개혁은 추상적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국가의 실험과 실패 끝에 증명된 현실의 언어다.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고 단기 인기 정책이 제도를 잠식할 때 시장은 늘 한발 먼저 경고를 보낸다.
지금 우리가 외면하는 선택의 비용은 결국 더 큰 형태로 미래세대에게 돌아간다. 연금, 재정, 노동, 교육 문제는 누군가에게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경제사회의 발전이 지속 가능한가의 문제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믿는다. 수많은 위기에서도 방향을 바로잡아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한국 역시 굴곡 속에서 성장해 왔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직시할 용기와 불편한 결단을 감내할 리더십이다. 숫자와 지표 뒤에는 늘 사람이 있고 제도 뒤에는 선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