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책임을 다하다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2-02 00:10:39
  • 수정 2025-02-03 20:59:40

기사수정



은행나무 가로수 한 그루가 죽었다. 죽는 데

꼬박 삼년이나 걸렸다. 삼년 전 봄에

집 앞 소방도로를 넓힐 때 포클레인으로 마구 찍어 옮겨심을 때 

밑둥치 두 뼘가량 뼈가 드러나는 손상을 입었다. 테를 두른 듯이 한 바퀴 껍질이 벗겨져 버린 것,

나무는 한 발짝 너머 사막으로 갔다.


이 나무가 당연히 당년에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삼년째, 또 싹이 텄다. 이런, 싹 트자마자 약식절차라도 밟았는지 서둘러 열매부터 맺었다. 멀쩡한 이웃 나무들보다 먼저 

가지가 안 보일 정도로 바글바글 여물었다. 오히려 끔찍하다, 끔찍하다 싶더니 이윽고 

곤한, 작은 이파리들 다 말라붙어버렸다. 나는

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차라리 안도하였으나,

마른 가지 위 이 오종종 가련한 것들

그만, 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소리 지를 수 없다. 꿈에도 들어본 적 없는 비명,

나는 은행나무의 말을 한마디도 모른다.


-문인수 시인의 시 '책임을 다하다' 전문



이 시는 문인수 시인의 시집 《배꼽》에 실려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가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그제서야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밑둥치에 상처를 입은 은행나무도 죽음을 앞두고 더 서둘러 싹을 틔우고 끔찍할 정도로 바글바글 열매를 맺는다. 바라보는 화자는 그 모습이 애처로워 "그만,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소리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나무의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마음은 헤아릴 수 있어서다.


자연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훼손한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작가 맥스 어만(Max Ehrmann)은 수많은 별과 나무처럼 우리도 거대한 우주의 구성원이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한계에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책임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3.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2025년 포엠피플 신인문학상 주인공 22세 이고은 "시 없인 삶 설명 못 해" 올해 《포엠피플》신인문학상은 22세 이고은 씨가 차지했다. 16일 인천시인협회 주관하고 인천 경운동 산업단지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351편의 경쟁작을 뚫고 받은 것이다. 행사 1부는 《포엠피플》 8호 발간(겨울호)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2022년 2월, 문단의 폐쇄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회원들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기치 아래 창간된 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