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시아의 호모룩스(Homo Lux) 이야기] 코 없는 사자
  • 박정혜 교수
  • 등록 2024-12-09 00:00:01
  • 수정 2025-01-14 21:52:16

기사수정


 

냉혹한 사자가 있었다. 온갖 동물을 무자비하게 해치웠다. 그놈한테 당한 동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동물들의 원한이 숲을 뒤덮었다. 세월이 흘러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사자한테 멧돼지가 다가와서 외쳤다. "원수를 갚아주마!" 그렇게 하면서 고작 한 것은 사자 코를 깨무는 거였다. 사자가 살려달라고 하며 산 아래로 굴러갔다. 지나가던 황소가 사자 코를 삼켜 버렸다. 나귀도 역시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하며 사자를 발로 찼다. 겁에 질린 사자는 살려달라고 거푸 외치며 말했다. "지금은 옛날의 내가 아니오!" 그렇게 엎드려 비는 사자한테 나귀는 "그래,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야"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이승훈의 산문 시 '코 없는 사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양한 사유를 가진 '피해자'를 위한 절묘한 시다. 이 시가 어떻게 폭력이나 사기를 포함한 피해자들을 위한 시가 될 수 있을까? 숲속 동물들의 보복은 시시하다. 기껏 한다는 것이 코를 깨물거나 그 코를 삼켜버리거나 발로 찰 뿐이다. 사자가 했던 피비린내 나는 행태를 따라 하지 않는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사자를 무참하게 처치해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이토록 미약한 복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이 시는 처한 상황과 다르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가해자는 여전히 살기등등하고 늙고 힘이 빠진 사자가 아니며 반성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시와 들어맞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가해자는 인간의 탈을 썼으니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긴 할 것이다. 육체를 벗을 때, 불가사의한 성찰이 이뤄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가해자의 몫이니 따질 계제가 아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찍어야 할 방점은 나귀의 말이다. "그래,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야!"라는 구절 말이다. 그저 피눈물 흘리며 울분이 가득한 채 고통 속에 빠져 있던 과거의 내가 아니다. 견뎌내고 버텨낸 덕분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세월에 진 것은 사자이지만, 세월을 이겨낸 것은 나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난 뒤에 비로소 얻게 된 것은 '영혼의 성장'이다. 

 

성숙한 내면을 가진 이들은 사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 치졸하게 애원하는 사자한테 발길질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그것은 그냥 발길질이 아니라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기운이다. 오랫동안 원한을 안은 채 피폐하고 시들어간 마음의 활개를 펴는 순간이다. 기적 같은 치유를 위한 첫걸음은 어떻게 내디뎌야 할까? 그런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 지경이 되도록 내쳐두었던 나한테 휘두르는 채찍질을 그만 거두는 것이다. 실수와 모순투성이인 나를 있는 그대로 보듬어주는 것이다. 오래 견뎌온 나한테 "괜찮아, 잘했어, 잘할 거야"라고 토닥토닥 해주는 것이다. 지독한 삶을 지극하게 버텨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말하고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다 보면, 주어진 삶의 짐을 거뜬히 나르는 슬기롭고 겸손한 나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이다. 라틴어로 인간(HOMO)'와 빛(LUX)의 결합어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에세이다.

 

 

덧붙이는 글

박정혜 교수는 1급 정신보건전문요원, 1급 보육교사, 1급 독서심리상담사, 미술치료지도사, 문학치료사, 심상 시치료사다. 2006년 <시와 창작> 신인상, 2015년 <미래시학>신인상을 받았고 소설로는 2004년 <대한간호협회 문학상>, 2017년 <아코디언 북>에 당선됐다. 현재 심상 시치료 센터장으로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전주비전대 간호학과, 한일장신대 간호학과, 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겸임교수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한국은행 국제금융·외환시장 동향] 2026년 1월 이후 '달러 약세에도 원화 뒷걸음' 2026년 새해.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전환 기대감과 기업 실적 호조에 힘입어 훈풍이 불었다. 미국 국채 금리는 하락했고 주요국 증시는 상승세를 탔으며 '킹달러'의 위세도 한풀 꺾여 달러화는 약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대한민국 외환시장의 풍경은 달랐다. 달러가 약세를 보였음에도 원화 가치는 오히...
  2. [관세청 수출입현황] 2026년 1월 수출 658억달러 ‘역대 최대’…8개월 연속 증가 2026년 1월 수출이 658억 달러로 역대 1월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관세청이 발표한 2026년 1월 수출입 확정치에 따르면,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33.8% 증가한 658억 달러, 수입은 11.6% 늘어난 571억 달러로 집계됐다. 무역수지는 87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2개월 연속 흑자를 이어갔다. 1월 수출은 반도체와 승용차 등 주력 품목의 호조에 힘입어 8개...
  3. [한국은행 금융시장동향] 2026년 1월 코스피 5300시대 개막…펀드 91.9조 유입 2026년 새해 벽두. 대한민국 금융시장은 자금이 대이동하고 있다. 은행 창구에서는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반면 증시를 향한 투자 자금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코스피지수가 사상 유례없는 5300선을 돌파하는 등 주식시장이 펄펄 끓어오르자 시중 자금이 더 높은 수익을 쫓아 방향을 튼 결과다. 가계대출은 정부의 관리 기조 속에 주춤.
  4. [한국은행 소비자동향] 2026년 2월 경기 훈풍 탄 소비자심리지수 112.1…전월 대비 1.3p ↑ 한국은행이 24일 발표한 '2026년 2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2.1을 기록했다. 1월 110.8에서 1.3p 상승한 수치다. 이 지수가 100보다 크면 2003년부터 2025년까지의 장기 평균보다 경제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의미다. 소비자들의 경제 전반에 대한 긍정적인 심리가 뚜렷하게 확산하고 있다.경기 판단·전...
  5. [수출입동향] 2026년 2월 역대급 수출 터졌다…반도체 타고 일평균 첫 30억 달러 수출 2026년 2월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29.0% 증가한 674.5억 달러를, 수입은 7.5% 늘어난 519.4억 달러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무려 155.1억 달러 흑자를 달성했다. 대한민국 무역 역사상 전 기간을 통틀어 월간 기준 최고 흑자 규모다. 수출은 9개월 연속 해당 월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13개월 연속 무역흑자 행진도 이어갔다. 설 연휴 탓에 조업일수...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