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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언제나 영화처럼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6-15 00:48:19
  • 수정 2025-06-15 12: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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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필름처럼 레일을 지난다

어떤 환등의 불빛이 그 안에 들어 있는지

차창으로 이어진 장면 장면이

풀려지는 릴만 같아서

결말을 알 수 없는 예고편처럼

종착역이 궁금해진다

건널목 차단기가 액션으로 올라가고

갓길 트럭 앞유리는 달빛을 받아 비춘다

저녁은 단역처럼 사소해진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은 일 초에 스물넉 장

스쳐가는 사진의 풍경이 아니던가

정작 기억해야 할 건 어둑한 상영관

영사기에 비친 먼지의 배역,

가없이 떠다니는 존재의 명멸 같은 것

눈 감아도 아른거리는 네온간판들,

영화의 잔상효과처럼

이곳을 주시하며 좌석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 막의 그림자를 흔들며

포장마차는 마지막 손님을 상영한다

담벼락 뒤로 사라진 겹겹의 포스터와

바람이 느리게 끼워 넣는 실루엣에 대하여

나는, 영화처럼 살다 갈 것을 상상한다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해야 한다


-윤성택 시인의 시 '언제나 영화처럼' 전문



윤성택 시인의 시집 《리트머스》에 실렸다. 흔히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고 한다. 그 영화는 감독도, 배우도, 영원한 관객도 모두 "나"일 것이다.  


돌아보면 클라이맥스는 언제였을까? 지났는지도,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눈을 감으면 스쳐가는 풍경 중에 아른거리는 삶의 "잔상"들이 "네온간판들처럼" 반짝일 때가 있다. 밝고 분명한 곳보다 "~어둑한 상영관 / 영사기에 비친 먼지의 배역"처럼 오히려 흐릿하고 사소한 것들 속에 삶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동안 보았던 것들도 사실은 "붉은 막의 그림자를 흔들"면서 "마지막 손님을 상영하"는 "포장마차" 일지도 모른다.

 

플라톤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는 것은 사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이라고 했다. 태양빛이 만들어낸 진짜 사물들의 그림자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강조했다. 


시인은 그 불완전한 그림자 안에서조차 삶의 깊이를 발견한다. 지나간 "겹겹의" 시간들과 "바람이 느리게 끼워 넣는 실루엣"을 느끼며 나의 영화를 만들어 가라고 말한다. 지금 이 소중한 순간이 "오래 기억해야" 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시처럼 영화적 시선으로 지나간 삶을 투시해 보니 평범하고 사소한 순간도 모두 소중하게 다가온다. 읽다 보면 우리의 삶도 세상에 하나뿐이 없는 귀한 "영화" 작품으로 승화한다. 남은 생도 다독이며 좀더 나은 엔딩을 만들어 가고 싶어진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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