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말이니 봄이 다 간 셈이다. 날씨는 더워지고 해를 피하게 된다. 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무거움에 짓눌려 있다. 꽃이 피고 아름다움이 더할수록 답답함과 슬픈 감정도 함께 일어난다.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4·16세월호 참사 등 희생으로 그러잖아도 봄 같지 않았는데, 지난해 12·3내란을 일으킨 세력들이 지금까지도 득세를 부리고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도 그랬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18년 유신독재가 끝나고 민주의 시대가 올까 기대했는데, 전두환 신군부가 국가 권력기관을 접수하고 집권 야심을 드러냈다. 이때 김종필이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며 '춘래불사춘'이라 했다.
당나라 때 동방 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온다.
중국이 땅덩어리가 커서 셀 것 같은 선입견이 있지만 옛날에는 중국 북쪽에 사는 유목민족들이 훨씬 셌다.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이 되면 말을 튼튼히 살찌워서(天高馬肥 천고마비) 중국의 변경에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인마와 물자를 약탈해갔다. 그러므로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물과 세폐를 바쳐서 평화를 샀다.
한나라의 일곱 번째 임금에 와서야 북쪽에 사는 흉노족을 정벌하고 위신을 세운다. 둘레의 여러 나라도 제압했고 그래서 무제(武帝)이다. 제11대 임금인 원제(元帝) 때는 흉노의 제14대 선우(單于)인 호한야가 한나라에 입조해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원해서 왕소군을 하사받았다.(기원전 33년)
전설에 따르면 원제는 궁녀가 많아서 화공(畫工)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왕소군은 가난하여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고, 원제는 그중 못생긴 궁녀인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뒤에 그녀가 절세의 미인임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일, 외국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격노하여 왕소군을 그린 화공 모연수의 목을 쳤다고 한다.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35살에 일생을 마쳤다. 본명은 왕장(王嬙)이며, 중국의 4대미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약70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왕소군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이 시가 지어졌다. 이백(李白)이 지은 <왕소군>도 있다.
王君怨소군원
동방 규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왕소군의 원한
한의 다스림 처음 번성하여
조정에는 무신들 넘쳐나건만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가
고생스러운 화친 길 멀고도 멀다
눈물을 삼키며 궁궐과 작별하고
슬픔을 머금고 흉노 땅으로 향하네
선우는 놀라 그저 기뻐하지만
예전의 낯빛을 다시 찾을 길은 없구나
오랑캐 땅이라고 어찌 꽃풀조차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허리띠가 느슨해져도
몸매를 위한 것은 아닐지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