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가이자 근대판화연구가인 홍선웅 작가
홍선웅 작가는 우리나라 목판화의 굵직한 대들보이다. 1982년 <바람부는 날>이 그의 첫 작품이니까 올해로 43년째 목판화를 하고 있다. 집은 인천 연수구에 있지만 판화 작업실은 김포시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작업실에서 보이는 한강 하구에는 남북 분단의 상징인 철책이 동에서 서로 길게 뻗어있고, 흐르는 물줄기 건너편에는 북한의 개풍군이 보인다. 무논으로 향하는 경운기 소리가 잦아들면 마을은 다시 평온하고 조용해진다.
마을 회관 구옥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한 작업실 건물은 마을 한가운데 있다. 1층은 작업실 겸 전시장이고, 2층은 판화 작품과 목판, 그리고 한지와 물감이 있는 수장고이다. 수장고 맞은편 방은 서재 겸 차실이다. <한국근대판화사>와 산문집 <판각 기행>, 그리고 여러 편의 근대 판화 관련 논문을 쓴 작가이기에 서적과 자료들이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분단의 경계에서 살며, 작품 속에 분단 풍경을 담고 있는 작가와 나눈 대화를 1부 <분단 시대를 걷다>, 2부 <매향 차향 목향>으로 나누어 연재하려 한다.
1부 <분단 시대를 걷다>
1. 작가님, 안녕하세요? 마을이 조용합니다. 공기도 참 좋네요. 집은 인천에 있는데,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이곳에 온 지는 올해 30년이 됩니다. 인천 시내는 작업실이 비싸니까 집에서 가까운 외곽 지역으로 눈을 돌린 거지요. 공기 좋은 시골에서 작업하고 싶은 생각도 컸고요. 이곳에는 마을 회관이 두 개가 있는데, 마침 옛 마을회관이 비어 있더군요. 월세로 들어왔는데, 건물이 퇴락해서 수리할 곳도 많다 보니 2019년에 구입해서 리모델링하였지요. 목판 수장고를 겸한 창고도 건물에 붙여서 지었답니다.
1980년대는 서울의 민미협(한국민족미술인협회)과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에서 실무자로 활동을 했지만, 큰 수술을 하고, 몸이 쇠약해지면서 더 이상 조직 활동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이 마을에 자리 잡고 나서는 정말 사는 것 같았어요. 봄이면 새싹이 움트고,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뭇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늘 혼자였지만 편하고 행복했어요.
이곳에 온 후 작업도 많이 변했어요. 불교 고판화와 전통 각법을 연구하고 또 조선시대 진경산수에 대한 공부하면서 먹에 대한 쓰임새도 관심을 가졌지요. <경진년진경판화첩>(2000년), <선암사>(2003), <화개춘경>(2005), <한송정>(2005) 등이 이때 나온 수성목판화들인데, 모두 먹과 수성물감으로 찍은 거지요. 수성과 먹이 주는 담백한 느낌은 유성물감과는 다른 멋이 있거든요. 그 중에서도 <갑신년모악도첩>(2004)은 천연 염색한 무명에 먹으로 찍은 것인데, 먹판화의 대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작품은 2021년 중국의 남경예술학원 굉약미술관에서 기획한 '국제수인목판요청전-공생의 힘' 전시에 초대받아서 전시했었어요. 코로나가 한창 유행 중이어서 가보지는 못하고 작품만 보냈지요. 내년에는 중국 소주미술관에서 수성목판화전을 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지금 작품 준비 중입니다. 중국 남쪽 지역은 수성목판화가 발달해서 국제목판화전을 대부분 수성목판화로 개최합니다.
그러나 수성판화를 하면서도 민중미술에 대한 시각을 멈춘 것은 아닙니다. 이곳은 그 자체가 바로 분단 풍경이니까요. 이곳에 오자마자 정희성의 시 ‘휴전선에서’를 생각하며 먹판화 <염하강>(1995)을 제작했어요, 문병란의 ‘김첨지’에 나온 시 구절을 판화로 형상화한 <판문점>(1995)도 이때의 작품이지요.
2. 그럼 자연스럽게 판화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가볼까요?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민족통일도>(1985), <통일의 꿈>(1989), <해방의 노래>(1990)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중 판화 작가이신데, 1980년대와 90년대에 문학지의 표지와 속지 삽화를 판화로 제작하면서 황석영, 조정래, 고 김남주 선생 같은 문인들과도 교류가 많이 있으셨지요?
홍선웅, 함성, 목판화, 22.5X26.5cm, 1990 <다리>지의 삽화
1980년대는 민중판화의 전성기였어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반민주적 행태는 극에 달했지요. 지배권력은 분단을 악용하여 국민을 억압하고 국민주권과 법치주의는 수시로 무너졌어요.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은 학생, 노동, 농민, 빈민, 문화, 교육, 언론 등 부분별 운동으로 크게 확장되면서 문화 또한 정치적 문화투쟁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지요. 특히 흑백으로 찍은 민중판화 이미지는 메타포로서의 저항 의식을 강하게 대변했었지요.
판화 자체가 인쇄 출판 매체와 연결이 깊어서 문학지의 표지나 시사 잡지의 삽화, 집회 전단지, 포스터, 대학 신문, 대형 걸개그림 등에 많이 사용되었고 그때마다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어요.
황석영 선배와는 월간 <신동아>에 ‘평야’를 연재할 때 목판화로 삽화를 했어요. 황선배가 갑자기 유럽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4회까지 하고 연재가 중단되었어요. 조정래 선생님과는 해냄출판사의 <태백산맥> 소설 표지를 제작했어요. 그 외 조선생님의 <대장경>, <어떤 솔거의 죽음>, <유형의 땅> 소설 표지도 했고요. 오래 전에 작고하신 김남주 선배와는 다리지에서 ‘역사의 길, 통일의 길’을 연재할 때 판화 삽화를 맡았었어요. 김선배가 감옥에서 오랫동안 계시다 출소하자마자 시작한 연재였는데 비록 소품이었지만, 그때 괜찮은 판화들이 여러 점 만들어졌지요. 1년 넘게 연재를 했어요. 그 외에도 작고하신 백기완 선생님의 통일문제연구소, 신경림, 이기형 선생님을 포함해 문병란, 이상국, 노향림, 고형렬 시인의 시집 표지 삽화를 했었습니다.
당시에 판화는 출판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넓게 퍼져나갔어요. 그것이 판화의 장점이기도 해요. 대중들은 출판물의 표지 판화를 보면서 작가와 그 시대를 함께 공감하였으니까요.
3. 선생님 말씀처럼 분단은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이 시대에 풀어야 할 절실한 과제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우리 민족사는 여전히 정치적 군사적으로 혼돈 상태입니다. 보구곶리 작업실에 계시면서 최근에 <연평도 포격>이나 세월호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신 것도 민중미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될까요?
홍선웅, 그리움1-세월호10주기 추모, 목판다색, 80.0x60.0cm, 2024
분단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분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세력과 남북이 상호 교류를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가려는 세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아직도 남한의 민주 세력을 향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쓰면서 계엄령까지 선포하는 권력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잖아요. 좌우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분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국민 주권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지배 권력의 대표적인 사례예요. 지난 겨울 온 국민이 얼마나 분노했었나요? 매일 추운 거리에 나와 저항했던 우리 국민들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려야 하는 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올바로 직시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를 묻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도영이라는 화가가 있었어요. 1909년 창간호부터 오세창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민보에 시사 만평을 연재한 작가예요. <벌거벗고 환도 찼군>이란 만평을 통해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에 날인한 군부대신 이병무를 실날하게 비판했어요. <이완용의 자부상피>를 통해서는 이완용을 조롱하고 <배우창곡도>에서는 국권 회복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지요. 식민지 지배 속에서도 화가로서의 임무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분이지요. 이러한 것이 바로 민중미술 아닐까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나 사건을 외면하지 말고 작품으로 표현하면 그게 민중 미술이지요. 하이데거는 “세계를 인간 삶의 공간으로 이해할 때 실재하는 나와 사물의 상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어요. 사물이나 사건을 인식론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실천적 해석과 관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아무리 강압적이더라도 <조선 징병제 시행 기념 기록화>까지 그려가면서 황국화 정책에 동조하면 안 되잖아요. 단광회의 지도급 미술가들이 이런 식으로 조선청년들을 전쟁터에 몰아넣는 것이 할 짓인가요?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아예 소설가 김동리처럼 잠시 펜을 꺾고 절에 들어가 있든지, 아니면 1930년대 이병규 화가처럼 조선미전의 관료주의에 반발하면서 오직 목일회 동인전만 출품하든지, 이건 작가로서 선택과 자세의 문제이며, 사건과 상황을 인지하는 분별력의 문제라고 봅니다.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중요해요. 허공에 대고 선만 긋든지, 점만 찍든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폐수를 마시고 죽어 있는 철새나 물고기를 보며 환경문제를 생각하든지, 그래서 이 주제를 시대정신으로 선택하든지, 이것은 분별의 문제이며 선택 범위입니다. 이럴 때 레비나스는 “사물이나 사건을 자아 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의 시각으로 생각하라”고 말해요. 동일할 수 없는, 그래서 차이가 무수히 많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좁히는 타자 윤리학의 관점을 말합니다. 나의 주체성을 낮추고, 타자성을 환대하는 만남의 중요성을 말해요. 극좌니 극우니 하면서 사회를 이분화시키는 논리는 관계의 모순만 팽창시켜요. 햇볕이 있으면 당연히 그늘도 있다는 상보적관계를 인지해야지요.
최근에 한 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게요. 작품 중에는 <소래포구>(2010)나 <해안동>(2010), 정방폭포(2018)와 같은 진경판화도 있지만 민중판화도 계속하고 있어요. <연평도 포격>(2012), <백령도-종이학>(2013), <제주4.3진혼가>(2018), <시암리 초소>(2018), <전류리 포구>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시대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을 작품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가치를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은 예술가의 소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홍선웅, 사암리 초소, 목판화, 76.0x134.0cm, 2018
작년이 세월호 10주기였어요. 그동안 작품을 못해 하늘에 있는 아이들과 유가족에게 늘 미안했었는데, 작년에야 두 점을 완성해서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에서 발표했지요. <그리움1,2-세월호10주기추모>(2024) 입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안산에 있는 경기도미술관에서도 전시하고 있어요. 지나간 일이지만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던 세월호 사건을 작가로서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요. 꼭 남겨놓고 싶었던 작품입니다. 민중미술의 범위는 넓고 큽니다. 전쟁, 폭력, 분단 극복, 환경, 기후, 생태, 생명, 종교, 계급, 민족 간의 갈등 등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유해야할 내용들이 많아요. 이것은 우리의 삶과도 직결되고 전 지구적 세계인의 삶과 공유해야할 내용이지요.
홍선웅, 그리움2-세월호10주기 추모, 목판다색, 80.0x60..0cm. 2024
4. 신문을 통해 선생님 기사를 보았는데 최근 2~3년 사이에 파리와 독일에서 작품을 여러 번 발표하셨지요? 그곳의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2022년에 김포문화재단과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베르사이유미술대학 주최로 한국-프랑스 현대목판화전이 있었어요. 한국작가 17명과 프랑스 작가 14명이 김포아트빌리지 아트센터의 전시를 시작으로 파리 한국문화원과 베르사이유미술대학 미술관에서 현대목판화전이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계기로 파리와 룩셈브르크 화랑에서 소품전도 있었구요. 40년 만에 파리에서 하는 목판화 전시라서 관심과 호응이 컸어요. K-Woodcut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 전시라고 생각해요.
같은 해 11월에는 파리 아트 북 페어인 제26회 <쌀롱 빠즈>에 파리에 있는 갤러리의 초대로 판화 소품 몇 점과 판화 화첩 두 점을 출품했어요. 아트북 전이니까 병풍처럼 펼쳐 볼 수 있는 화첩이 필요했어요.
2023년에는 독일국제목판화협회인 싸일론(XYLON) 70주년 전시에 한국 작가로는 저와 안정민 두 사람이 처음으로 초대 받아서 전시를 했습니다. 싸일론은 유럽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목판화협회에요. 한국에서 70년 만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독일협회는 케테 콜비치의 후예들이 이끄는 조직이어서인지 제 작품에 공감하는 심의위원이 있었나 봐요. 로이틸링엔에 위치한 쿤스트미술관과 피르마센스 지역에 있는 알테포스트 미술관에서 전시했었습니다.
2024년에는 파리 세르누치시립미술관에서 ‘한국현대판화전’이 열렸어요. 불교전문미술관인데, 2022년도에 한국작가로부터 기증받은 판화 38점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후 전시한 거지요. 이 미술관은 한국과 인연이 많아요. 여기서 운영하던 동양미술아카데미에서 이응노 화백은 20년간 수업을 했었고, 당시에 그는 작품 100점을 기증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김기창, 이상범, 변관식, 장우성 등 많은 한국 작가들이 전시를 했더군요. 여기서 전시했던 우리 판화작품들을 파리 외곽에 있는 판화전문미술관에서 다시 순회전 형식으로 기획 중이라고 들었어요.
선생님께서는 K-Woodcut의 역사이시네요.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부 <매향 차향 목향>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홍선웅 선생님 소개
1952년 진도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성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에서 최영림 교수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미림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1985년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해직되었다. 3년 후 복직되었으나 전교조 가입으로 다시 해직되었다. 1980년대 민미협 사무국장, 민예총 국제국장, 대변인을 거치면서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2006-2008), 인천문화재단 이사(2023-2025)을 역임했다.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인천문화재단, 파리 세르누치시립미술관, 퀼른 안파리나 화랑
저서: 한국근대판화사(미술문화, 2014), 판각기행(미술문화, 2001)
논문: 표지장정에서 출발한 판화가 이정(근대서지19호, 2019)
옥중화에 나타난 이도영의 목판화 도상연구(근대서지 17호, 2018)
일제강점 초기의 판화와 신찬대방초간독(목판2호, 2017)
한국 근현대판화의 흐름과 이상(理想), (<붉은 꽃이 피다(Red Blossom> 도록, 일민미술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