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식 시인·평론가
안녕하세요? 시간 내주어서 고맙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시와 평론을 쓰는 고광식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가볍게 질문드립니다. 요즘 어찌 지내시고 계신가요?
첫 평론집을 내는 과정의 피로감으로 잠시 글쓰기를 쉬고 있습니다. 현재는 읽기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독서로 고갈되었던 지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입니다.
네, 그렇군요. 새해 꼭 이루고 싶은 일이 궁금합니다.
오래전부터 저녁 식사 후 산책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산책은 ‘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즘 산책을 쉬게 되는 날이 많았어요, 올해부터는 주 5일 이상 산책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고광식 지음 / 파란 / 30,000원
최근 등단 12년 만에 첫 번째 평론집 《착란》(파란)을 발간했습니다. 소회를 들어볼까요?
오래전부터 문학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시가 되었든 평론이 되었든 형식만 다르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가 질문이라는 말을 했더라고요.
사르트르는 문학 장르 중 시를, 저는 문학 전체를 질문으로 본 것이 다르긴 합니다. 이번 평론집을 통해 세계와 문학장에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아보았습니다. 평론이란 형식을 빌려 이성적 질문을 던진 첫 비평집이어서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평론집 구성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평론집은 5부로 구성됐습니다. 1부에서는 문학 장 안을 톺아보는 글들로 묶었습니다. 「Chat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에서 한국의 명시 7선을 ChatGPT에서 써보게 했고 둘을 비교 분석했습니다. 시의적절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부에서는 고립의 사회학적 상상을 다룬 글을 묶었습니다. 페미와 퀴어의 문제에 대해 사회에 질문을 던진 글들입니다. 페미는 아직 양성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으며 퀴어는 성숙하지 못한 인권의 문제로 귀착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부에서는 원본 없는 시간들, 4부에서는 서로 다른 파편화된 고백의 글들을 묶었습니다. 공통점은 우리 사회 현대성의 특징인 고립과 파편화 우울 등에 대해 각기 다른 시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제라도 자본주의 현상 안쪽에 굳게 닫혀 있는 아포리아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5부에서는 영화가 던지는 상처적 질문을 묶었습니다. <춤으로 통하다>는 단편의 영화 평론이고 나머지 두 편은 긴 호흡으로 <무뢰한>과 <마돈나>를 분석했습니다. <무뢰한>에서는 페르소나의 자의식 문제를, <마돈나>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고광식 평론가가 생각하는 시와 비평의 관계를 질문드려 봅니다.
본질적으로 시와 비평 모두 창작입니다. 시는 조건 없는 창작이고 평론은 시를 질료로 한다는 점에서 조건 있는 창작입니다. 질문하신 요지가 시와 비평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에 맞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는 시적 촉수를 가지고 질문의 형식으로 언어의 실험을 보여줍니다. 이때 비평은 시적 질문을 메타적 질문으로 바꾸어 읽습니다. 그 시적 질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비유하자면 시와 비평은 명창과 고수의 관계입니다. 고수는 명창의 소리를 듣고 장단을 칩니다. 기계적으로 맞추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소리를 밀어주고 당겨줍니다. 시인과 비평가의 관계도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주례사 비평을 지양하고 자의식이 강한 비평을 지향해야 합니다. 시인은 평론가에게 종속되지도, 평론가는 시인을 지배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K-문학이 탄탄한 비평 환경 속에서 발전합니다.
'시는 원본 없이 존재하는 삶의 에피파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질문하신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시뮬라크르에 대한 설명이 전제돼야 합니다. 사전적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의미하는 철학 개념입니다.
이 시뮬라크르는 서양철학에서 수많은 학자가 다뤘습니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에 대해 이데아의 모방으로서 현실이므로 부정적으로 보았만 들뢰즈는 이데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뮬라크르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은 시뮬라크르에 지배받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에 영감 받아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시뮬라크르나 원본 없이 존재하는 삶의 깨달음을 형상화한 시나 동일하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에 던져진 상태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원본 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는 삶에 대한 깨달음과 자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에피파니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는 삶을 탐구하는 예술 장르입니다. 그 탐구의 궁극적 본질을 표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5부에서 다룬 '영화가 던지는 상처적 질문'에 대해 부연해 주십시오.
문학이나 영화는 삶을 탐구하는 예술 장르입니다. 특히 영화는 생생한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로 상처받은 순간을 심오하게 표현합니다.
영화 <사도>를 보면서 대화 단절의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내적 이해와 성실성이 없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왕과 신하가, 아버지와 자식이, 당파와 당파가 대화를 안 합니다. 대화의 단절은 역사적 비극을 자초해 큰 상처를 만듭니다.
영화 <무뢰한>에서는 융이 주장한 페르소나를 쓰고 자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마돈나>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영화 평론에서는 각기 다른 계급의 인간이 어떻게 상처를 주고받는지 천착했습니다. 상처는 문학이나 영화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1990년 시인으로도 데뷔하셨죠? 소개 부탁합니다.
1990년 초 중앙대 안성캠퍼스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그때 정기간행물실에 비치된 <문학과사회>, <문학과비평>, <작가세계>, <민족과 문학>을 보았습니다. 네 잡지 중 어느 잡지로 등단할까 생각하던 중 '민족과 문학 1회 신인문학상' 마감을 1달 정도 연기한다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작품이 많이 접수됐지만 더 좋은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서라고요. 1회라는 것과 신인상 마감을 연기하는 이유가 마음에 들어 시 36편을 응모했고 '나무가 사람에게' 외 6편이 당선됐습니다.
등단 후 얼마 안 가 <민족과 문학>이 폐간해 문단의 미아가 됐습니다. 문예지는 발간한 순간 공공재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폐간하면 안 됩니다. 특히 신인을 배출한 상태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등단작이 진부한 것 같아 첫 시집에는 한 편도 싣지 않았습니다.
등단작과 첫 시집을 소개해 주십시오.
뜨거운 수액이 꽃병 속에 갇혀 있어요. 실눈 뜬 다리로 버틴 채 미쁜 몸털 하나 털고 있어요. 구름의 끝에서 나무와 바위가 숨소리 고르게 앉아 있어요. 때로는 혈관 속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네요. 버들눈으로 말하겠어요. 냇가에 알몸으로 뿌리내린 빛과 자유를 귀 기울여 보기도 해요. 바람처럼 물살을 키워올리는 실내, 아, 갈증나는 시간에 버들강아지 한 송이 피우겠어요. 허공을 흔들며 반쯤은 몸을 꽃병 속에 두기로 하겠어요. 하나의 소도구로 나는 미쁜 산의 자유를 꿈꾸고 있어요. - '석화버들에 대한 진술' 전문
등단한 지 30년 만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아르코창작기금을 지원받아 출판했고 시집은 문학나눔에 선정돼 2쇄를 발행하게 됐습니다. 나름 선전했습니다. 출판을 위해 투고한 메이저 출판사에서 한 곳은 4개월 다른 한 곳은 6개월 만에 거절 연락을 받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오랜 시간 검토했다는 건 출간 가능성이 높았다는 거니까요. 첫 시집은 남승원 평론가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면'으로 해설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남 평론가의 해설이 맞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도 몰랐던 내면의 비의를 들킨 심정입니다.
고광석 지음 / 파란 / 10,000원
혹, 공개하고 싶은 창작의 발화점이나 기법이 있을까요?
제 시 창작의 발화점은 세계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첫 시집에 실린 시 중 '사자에게 던져 줘'가 대표적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말한 편견 중 '종족의 우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평생 살면서 수많은 생명을 식탁에 올립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죽을 때 배고픈 동물의 한 끼 식사가 되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에서 썼습니다. 원초적 질문을 해 본 겁니다. 제 시가 잔부해지지 않기 위해 늘 깨어있는 자의식으로 노력하는 게 기법이라면 기법입니다.
두 번째 시집 발간은 언제쯤일까요?
시집으로 묶어낼 분량은 준비돼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성이 부족해 퇴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작품도 더 써야 하고요. 시집으로 펴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될 때 출간할 것입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인천시인협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인천시인협회는 2022년 2월에 창립됐습니다. 약 2년간 준비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코로나 기간이어서 저 또한 우울감이 심했습니다. 제가 사회성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코로나때문에 강제로 사회성을 박탈 당하니 힘들었습니다.
이 시기 첫 시집이 출간됐는데 기념식도 못 했습니다. 이런 반작용 때문에 점조직식으로 사람들을 만나 창립을 준비하고 결성하게 됐습니다. 현재 협회 회원 수가 60명이고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포엠피플은 회원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플렛폼으로 작동합니다. 편집회의에서 전국에 있는 시인과 평론가에 청탁하며 문학적 담론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의 문학적 수준과 열정은 매우 높습니다. 각종 문학상 수상이나 아르코창작기금과 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자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협회에는 공동선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사무총장 금희 시인, 편집주간 김네잎 시인, 북콘서트 진행자 최명심 시인 등의 희생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선경산업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해주고 있고요. 이사임원들과 편집위원들의 높은 식견과 전문성 때문에 앞날이 밝습니다. 저는 회원들 요청에 3대째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만 피로감이 누적돼 임계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포스트 고광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시와 평론(문학)이 가닿아야 할 궁극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작가의 길은 세계와 문화와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역사는 크게 보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믿습니다. 역사와 문학사는 함께 갑니다. 역사를 알면 당시의 문학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문학은 늘 항성처럼 빛났습니다. 문학은 스스로 빛나 우리 삶을 심오하게 해주지만 때로 앙가주망의 형식으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합니다. 작가(문학)는 현실을 꿰뚫는 질문으로 진실을 발견하는 자가 돼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십시오.
종교가 없는 제가 무비 스님의 《반야심경》을 읽었습니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가 핵심입니다.
스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는 텅 비어 있습니다. 텅 빈 공간에 무엇을 채우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시와 평론을 쓰는 것도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있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나, 즉 인간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적용하면 시와 평론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불교 철학의 심오함을 다시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못다한 말씀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AI시대의 창작 위기감을 수많은 작가가 말합니다. AI는 데이터로 작품을 만듭니다. 원래부터 문학작품은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창작입니다. 창작이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불러내는 행위입니다. 이제 우리는 데이터에 없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평론을 쓰면 됩니다. AI는 창작하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자 인상파 화가들이 출현했듯 이제 또다시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두려워 걱정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향후 계획과 더불어 독자들께 인사 말씀 부탁합니다.
저는 블랙리스트 작가입니다. 늘 읽고 사유하고 쓸 것입니다. 끊임없이 세계와 문화와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질문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광식 시인·평론가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민족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원, <포엠피플> 편집인, <민족문학사상>과 <아토포스>' 편집위원, '인천시인협회' 회장이다.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과 평론집 《착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