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시골에서 살았다 그야말로 작은 마을이었다. 어느 집을 망라하고 농사가 천직이었다. 그때만 해도 농사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 누구나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할 미래의 숙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게는 좁고 답답한 마을이었다. 도시의 건물을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시골생활이 싫었다. 농사는 내 삶에서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내 고향 작은 마을이 성장기 내내 초라하게 보였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도시에서 수년을 지낸 뒤 지독한 향수병을 얻었다. 도시가 보여준 현란한 외관은 내면적 생활과 차이가 컸다. 고향을 버린 나는 지금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그리운 걸까?
나는 이맘때면 잎이 다 진 감나무 가지 끝이 가리키던 저녁놀을 그리워한다. 일부로 남겨 둔 홍시 몇 알이 반짝이던 그 감나무를 그리워한다. 푸드덕 날아든 까치들이 한 끼니를 나누던 마당을 그리워한다. 처마 끝에 켜진 백열등이 감나무를 비추던 그 산 중턱을 그리워한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내가 그리도 싫어했던 모를 심던 날도 감자를 심던 날도 김을 매던 날도.
새참을 먹거나 점심을 먹기 전 부모님은 밥 한 술을 논과 밭에 던져 주었다. 그때마다 "고수레"라고 외치던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철이 든 뒤 그 아까운 밥을 왜 던져 주었는지 확실히 알았다.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의 실천이었다.
어쩌면 지금 '고수레를 외쳐야 할 때가 아닐까? '고수레 밥상'을 펼쳐야 할 때가 아닐까? 대대로 우리 몸에 아로새겨진 나눔의 정을 나눠야 할 때가 아닐까? 철저히 혼자가 되어가는 이 시대 앞에 외쳐야 할 단어가 아닐까?
까치밥
늦가을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몇 알
희뿌연 하늘 속에서 붉다
앞 산 너머에서 하늘길을 열며
나뭇가지에 날아든 까치 몇 마리
너도 한 입 나도 한 입
고수레 밥상 한 끼니 저녁이다
늦가을과 같은 말은 초겨울인데
둥치를 감싸는 감나무 이파리들
저 뜨끈한 천지간의 겨울나기
오래된 나눔의 식사법을 곱씹어보다가
마음도 노곤노곤 달콤해진다
너와 나로부터 모든 것이
속으로 속으로 벌겋게 익어가듯
저녁놀 물드는 지구 한 알도 홍시이다
-손병걸 시, '까치밥' 전문-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세계인 모두를 힘들게 한 '코로나'(Corona)에서 해방을 선언한 '위드코로나'(With Corona)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아마도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거나 까마득한 단어가 된 건 아닐까?
물론, 코로나라는 단어야 워낙 충격적이어서 각인이 되었겠다. 그러나 위드코로나라는 단어의 기억은 희미해진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빠르고 다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도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코로나가 올여름 다시 기승을 부렸다. 물론, 최초 때와는 병증의 차이가 달랐지만 직접 피해를 본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다. 당연히 지인들과 그 사람을 십시일반으로 돌봤다. 그 여파가 크지 않은 사람들은 다행이다.
여태껏 가라앉지 않아서 삶이 괴로운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꼭 바이러스에 의한 세상의 변화뿐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낯선 시대이고 그 낯선 삶을 대다수는 온몸으로 겪으며 살고 있다.
바이러스는 누구 하나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공동체의 문제였다. 협동이 절실히 필요한 문제였다. 누군가는 조금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그나마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은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돌봐야 했다.
그 간단명료한 행동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대에 누대를 거쳐 인간이 축적해 온 공동체의 가치였다. 국가적 사건이나 세계적 이야기는 내가 실천해야 할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실천의 형식은 크고 작은 단위나 그 무게를 따지지 않는다. 가까운 인척이나 주변을 살피는 일도 지구를 살피는 일도 다 같은 살핌이다. 아주 사소한 듯 여기지만 모든 나눔은 큰 나눔이다.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행동하면 훌륭한 일이 널리 퍼지는 것이다. 오래된 말이지만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이 요즘은 선한 영향력을 억제하는 안타까운 말로 사용되곤 한다.
인간사가 각박해질수록 우리는 우주 만물과 함께 살 까치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고수레"라는 말 한마디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저녁놀 물든 지구를 한 알의 홍시라고 하니, 지구가 더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네요. 요즘 오가며 본 어느 집 대봉도 점점 붉은 등을 켜고 있지요. 따스한 등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