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책과 서류 더미와 신문을 들춰보았다. 검은 양장 공책을 넘기자 노란 갱지에 줄을 쳐놓았고 물품구매와 구매 가격 등을 적은 것이 보였다. 줄은 간격이 골랐고 한 줄도 어긋나지 않게 찍어낸 듯 쳐졌다. 공책을 후루룩 넘기다 뒷부분에 끼워진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흑백 여자 사진이었다. 나는 여자가 민석의 엄마일 것이라 짐작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 긴 치마에 반소매 흰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테 안경을 쓴 여자는 손수건으로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묶고 나무 옆에 서 있었다. 커다란 책을 양손으로 모아들고 서서 웃고 있었다. 웃음은 헤퍼 보이지 않았고 단정했고 조금 드러난 치아는 작고 가지런했다. 검은 나뭇가지에는 옅은 검은 꽃이 피어있었다. 꽃나무를 보자마자 관사 마당에 있는 홍매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당황스러웠던 것은 민석의 엄마가 할머니와 엄마가 이웃 여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헤픈 술집 작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어떤 여자들보다 단정해 보였다. 치마 안으로 집어놓은 블라우스 허리 주름마저 깔끔해 보였다. 나는 바로 위 언니에게 물려받은 빨간 책가방 안에서 국어책을 꺼내 갈피 사이에 사진을 끼워 넣었다.
발한동 철도 관사에는 묵호역에서 일하는 역무원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독립적으로 한 채씩 된 사택과 두 집이 붙거나 네 채가 붙어 있는 사택이 있었다. 언덕 위쪽에 있었는데 관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오래된 굵은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물푸레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노인들이 장기판을 벌이기도 했다. 관사로 들어가려면 그곳을 지나쳐야 했기에 관사 마을로 들어서면 모두 그를 알은체를 하거나 낯선 이가 들어서면 호기심을 보였다. 빨간 양산을 쓴 여자가 물푸레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날 물푸레나무에 관사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관사 안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반나절을 물푸레나무 아래 서 있던 여자가 관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사 안의 여자들은 담 안에서, 부엌에서, 창 안에서 여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누구요? 커다란 목청을 가진 엄마가 포도 넝쿨이 뒤덮은 대문을 열었다. 엄마는 양산을 접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배를 보았다. 엄마의 뱃속에는 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연탄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연탄가스가 나오니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방 창문과 부엌문 옆의 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무 문을 걸었다. 마당으로 나오니 어느새 눈은 멈췄고 바닥이 검게 질척거렸다. 모습을 드러낸 해가 빛을 내기도 전에 높고 깊은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민석은 연탄집게로 검은 흙을 파내 물이 흐르는 길을 내 검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새로 산 점퍼에 검은 얼룩이 묻었다. 할머니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점퍼에 묻은 얼룩을 닦아냈다.
천변 둑길 위로 올라가자 건너편에 여러 채를 이어 붙인 건물이 보였다. 하천 바닥에 목재와 철재를 지지대로 만든 물 위의 빽빽한 건물 여기저기 연소 통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철암역사를 지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에서도 매캐한 연탄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해주옥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는 허름한 가게였는데 안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다. 예닐곱 개 알루미늄 탁자에 푸른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들 얼굴은 모두 새카맸다. 가운데 뚫린 구멍 안에 들어있는 연탄 위 석쇠에는 고기가 익고 익었다. 부엌 앞 탁자에 서서 고기를 뒤집어주던 여자가 할머니를 보자 아이고 엄니 왔소,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와 할머니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바글바글하네, 했다.
“도깨비 눈이 내려 다들 일찍 굴에서 빠져나왔더라구요. 아이고, 야가 가요? 잘 생겼네.”
여자는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고 민석의 얼굴을 빤히 봤다. 민석은 여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곁의 연탄불 위 석쇠에서 익고 있는 고기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여자를 주방 쪽으로 끌고 가 얼굴을 바짝 맞대고 속삭거렸다.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고기를 집던 사내가 민석에게 고기 한 점을 집어 참기름에 소금을 뿌려놓은 접시에 담갔다가 입에 넣어주자 민석이 날름 받아먹었다. 민석이 석쇠에 익은 고기를 손짓했다.
“아이고 고 녀석 맛있나 보구나. 몇 살이야?”
“일곱 살이요.”
사내는 민석이 가리킨 고기도 집어 입으로 바람을 불곤 입에 넣어줬다. 민석이 나를 돌아보곤 내 어깨를 잡고 자기 곁으로 당겼다. 다른 사내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나에게 내밀었다. 뱃속에서 주린 창자가 뒤틀리며 소리를 냈지만 나는 고기 따윈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민석이 사내의 손을 잡고 고기를 먹었다. 민석의 행동에 사내들이 제법이라며 한 마디씩 보탰다. 나는 할머니 곁으로 가 섰다.
“여기 미로 골목이 아니라 삼척 쪽 미로면으로 간 거로구만.”
-계속-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