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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들깻잎을 묶으며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10-04 22:36:20
  • 수정 2025-10-13 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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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오후,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로 흰 구름 몇덩이 지나가
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유홍준 시인의 시 '들깻잎을 묶으며' 전문



이 시는 유홍준 시인의 시집 《저녁의 슬하》에 실려있다.

추석날 모처럼 만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어머니 밭에서 깻잎을 따며 보낸 이야기이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해도 빤한 생활이지만 "돈" 대신 "깻잎"으로 치환하여 재밌게 오후를 보낸다. 어머니 품같은 너른 들깨밭에서 시퍼런 깻잎을 따서 다발 또 다발 묶으며 만원권 지폐 다발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를 하고 더 건강한 함박웃음을 나눈다. 웃픈 시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가난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정'이 중심임을 말해준다. 일상이 힘들어도 유머와 정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온기를 전하며 삶의 궁핍을 이겨내는 인간적 품격이 있는 시다. 가족 간의 우애는 부富와 비례하지도, 사랑의 크기와 같지도 않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고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비록 인생이 어머니 밭 위로 지나가는 "흰 구름"처럼 덧없어도 추석날 가족들이 모여 고단한 마음을 다독이고 같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지 싶다.

이번 추석에는 모두 그동안 쌓인 오해와 근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모처럼의 기쁨!"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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