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 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안희연 시인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전문
안희연 시인의 시집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에 실려있는 시다.
이 시는 "언덕" 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덕" 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점점 발화하여 사유를 확장하고 각자의 "언덕"을 만들어가게 된다.
여름 "언덕"을 걷다보면 그 기울기와 풍경 덕분에 기쁨 속에서 오르막길을 오를 때가 있다. 하지만 한참 가다보면 많은 물웅덩이를 만나게 된다. 좀더 걸으면 내리막길도 보인다. "언덕"은 희망, 순수등을 뜻하는 "흰 토끼"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현실에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울상이다. 삶은 늘 결핍을 통해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고요" 다음은 "폭풍우"가 오겠지만 또 "여름이라는 계절은 모든 것을 불태" 우며 이겨낼 것이다. 그 무수한 "언덕" 가운데 하필 이곳에 있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나오는 '영원회귀' 사상과 많이 통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영원히 반복되지만 그 삶을 실천적으로 긍정하며 그때마다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이 절창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한 것 같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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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