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어머니를 읽다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8-31 00:23:30
  • 수정 2025-08-31 14:56:21

기사수정


오래된 책을 읽는다 

털어도 먼지가 그대로인 책장을 넘긴다

푸른 잉크가 말라 파삭해진 종이

더러는 소금기가 배여 짠내가 났지만

다행히 낯익은 냄새다

찢긴 페이지가 있어 내용을 다 알 수 없는 책

책 끝자리에 까만 얼룩

누구의 손때가 만든 것일까

제본이 너덜너덜해져

내 몸으로 흘러든 문장들을 생각한다

주제의 빈약함을 숨기려 덧붙인 각주

의미를 생각하며 빨간색으로 그은 밑줄

상투적인 문장 옆에 써 놓은 낙서까지

마침표를 찾기 힘들다

바쁘다는 핑계로 읽다가 접어 둔 페이지가 여럿이다

접힌 페이지마다 주름이 깊다

책갈피에 끼워둔 꽃잎과 나뭇잎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져 빛이 바랬다

오랫동안 옆에 두고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책

이제 검지로 글자를 꼭꼭 눌러가며 

낡고 오래된 책을 정독할 시간이다


-이경숙 시인의 시 '어머니를 읽다' 전문



이경숙시인의 시집 <몸속에 그늘이 산다> 에 실린 시다. 책을 통해 어머니를 되새기며 관계를 돌아보는 가슴 뭉클한 작품이다.


시인인 화자는 어느날 낡고 먼지가 쌓인 책을 읽다가 나이 많으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시인에게 책은 분리될 수 없는 살이고 피인 것처럼 어머니도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라 파삭해진 종이에서 나는 짠내도, 책 끝자리 손때 묻은 까만 얼룩도, 모두 시인의 몸으로 흘러들어 문장이 된 것이다. 


가끔 빨간 줄을 그으며 새겨 듣을 때도 있었지만 상투적인 말씀에 딴짓할 때가 많았고 각주를 달며 대들기도 했다. 그렇게 관계는 마침표 없이 이어졌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접어둔 마음이 여럿이다. 찢긴 페이지가 있어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제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식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사용했다.


우리는 시간이 충분하리라 생각하여 부모님과의 시간을 다른 일보다 뒤로 미룰 때가 많다. 언젠가 읽은 생떽쥐페리의 <야간 비행> 에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참 와닿는다. "~일들을 '시간이 날 때' 로 조금씩 미루어왔음을 깨달았다. 마치 언젠가는 시간 여유가 생기기라도 할 것 처럼~." 아마도 그 시간은 연기만 될 뿐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필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깨달았다.


낡고 오래된 책이지만 검지로 꼭꼭 눌러가며 정독할 수 있는 시의 화자가 부러운 날이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70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한민국 수출이 AI 열풍을 타고 7000억 달러 벽을 넘으며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이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일평균 수출도 26.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대외 악재를 뚫고 이뤄낸 성과다.무역수지는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연간 780..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비빔국수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꽃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